중국의 불교중국의 신화에 의하면 한나라의 명황제가 어느날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는 꿈에서 자신을 가르친 노인이 말했던 외국의 신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신이 바로 부처이다. 꿈에서 깨어난 명황제는 사신을 인도로 보내 불교 사원을 방문토록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인도로부터 불교 성직자들이 들어왔고, 명황제는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불교 사원을 건설했다.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에 속한 이야기이고, 역사적으로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대체로 한나라와 유교의 영향력이 동반하락하던 1세기 말경이 아닐까 보고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원하여 지금은 이슬람 지역으로 변한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으로 들어왔다. 또 바다를 통해서도 불교 문화가 유입되었을 것이다.불교의 유입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일대 충격이었다. 적지 않은 저항도 있었겠지만, 불교를 중국으로 들고온 포교자들은 불교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을 했다. 여러 사람이 동일한 말에 대해서도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의 용어의 선택을 놓고 고민했을 것이고, 그 결과 현재 중국어 불경은 여러 가지의 버전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가지 번역본의 불경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원전은 하나라는데는 대체적으로 이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의 사조와 이론이 혼란스럽게 존재한다. 그러면서 결국은 토착화과정을 거쳤고, 중국 만의 독특한 불교의 이론이 발전했다. 이처럼 이론과 사상체계의 다양한 분화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크게 테라바다와 마하야나 등 두 가지로 구별해서 볼 수 있다.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의 나름대로의 체계와 전통을 갖춘 토착 민속 종교들과 경쟁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한 세력을 얻으면서 중국 사람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종교를 통해서 중국인들은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사상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죽음 후의 삶, 극락과 지옥 등의 개념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그야말로 흥미 진진한 개념들이었다. 불교는 또 중국인들에게 박애주의적인 도덕률과 함께 그들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보호와 치유의 약속도 주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 남성들에게 불교 사원은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그곳으로 들어감으로써 과중한 징세의 부담과 군대에 들어가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두려움, 귀족들과 정부에 의해서 강요되는 노역 등을 피할 수 있었다. 또 불교에 몰입함으로써 심리적인 안정감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중국의 엘리트들에게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토대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들은 명상을 통해서 새롭고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차원의 심리적 체험을 추구하기도 했다.이처럼 불교는 중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 동안 중국인들의 사회에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있던, 도교와 유교와의 충돌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불교는 외생종교라는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도교 및 유교와의 경쟁에서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불교가 중국의 엘리트 계급 속으로 파고 들기 위해서는 이국적인 요소들을 상당부분 청산하고 중국 문화에 동화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다. 흔히 불교승려는 속세와의 절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중국처럼 도교나 유교의 영향으로 효와 가족의 중요성이 강한 사회에서 불교가 속세와의 절연만을 주장해 가지고는 도저히 엘리트 사회에 파고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인들의 머리 속에서는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아들은 부모와 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철저하게 박혀 있었다.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은 기품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오로지 부처님만 섬기기 위해 출가를 한다는 것은 중국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승려로서 살아 간다는 것은 자신들의 먹을 양식들을 구하기 위해 일반 백성들을 찾아가 구걸을 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같은 생활을 중국의 엘리트들은 경멸을 했다.인도에서는 승려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승려들은 왕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절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중국의 소수의 엘리트들은 이를 반역이나 모독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종교 조차도 실사구시적이고 현실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공자는 사회의 안전과 군주적 질서,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 등 편안하고 안정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을 설파 했다. 반면 불교의 수행은 영적인 안정감과 새로운 차원은 영적 체험을 위해서 출가하여 속세와 절연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현세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기도 정치적 사회적 질서가 혼란스러워지고 안정이 약화되었던 시대였다. 이후 다시 중국의 질서가 회복되고 강력한 왕조가 출현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불교가 나름대로 강력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와 사상으로 자리 잡았고, 도교나 유교 사상가들도 불교를 함부로 중국에서는 추방하기는 어렵게 되어 버렸다.이후 수 백년 간 불교는 중국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이제 불교는 세계의 종교인 동시에 중국의 종교가 되었다. 불교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1966년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 아주 많은 사원들과 수도원들이 홍위병들에 의해서 폐쇄되거나 철거되었다. 콤프턴 리빙백과사전 1995년 판에 의하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들 가운데 자신을 불교신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6800 만 명에 이른다.띵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중국의 불교도 점차 그 세력을 얻어가는 추세이다. 2000년 경의 루터교의 중국관련 보고서를 보면 중국의 대도시마다 풍요로움과 함께 불교의 영향력도 커져 곳곳에 대형 사원들이 건립되고 있다고 한다. 또 근엄하고 위엄 있는 승려복을 입은 승려들과 수도사들을 거리에서도 흔하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리를 다니며 불교의 가르침이 인생의 공허감을 메워줄 것이라며 포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교사원에 가보면 젊은이들과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뿐 아니라 가난하고 글조차도 읽을 수 없는 사람들, 사회의 영향력이 큰 지도급 인사들과 부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불교사원을 출입하고 있다. 그들은 불상과 보디사티바(불교성자 상) 앞에서 절을 하고 기도하며 그들의 바라는 바를 빈다.적어도 현재 불교는 중국 정부로부터도 큰 반대나 탄압을 당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불교의 상징색이기도 한 붉은색과 금색, 그리고 짙은 청색 등의 천과 조각으로 만들어진 불교상징물들이 거리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처럼 불교가 중흥기를 맞이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불교에 대해 이렇다할 압박이나 탄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또 같은 불교라도 티벳불교와 불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다르다. 실제로 중국 정부의 불교에 대한 정책은 티벳의 독립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티벳불교는 현재는 인도에 망명 중인 그들의 지도자 달라이라마를 살아 있는 신이자 정치적 지도자라고 믿는다.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티벳불교의 융성은 곧 티벳의 분리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티벳불교를 소멸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티벳불교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대신 불교를 암묵적으로 지원하여 티벳불교의 견제세력으로 키울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다. 지난 1997년 중국 정부는 무려 800년이나 된 티벳불교사원을 강제 폐쇄시켰다. 그 이유는 그들이 중국정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달라이라마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티벳 전역에서 계속될 것이다. 중국정부의 또하나의 티벳불교의 정책은 일종의 어용화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중국정부는 달라이라마에 대한 충성만 철회한다면 반드시 티벳불교 자체를 말살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달라이라마의 후계자인 판첸라마를 지정했다. 그래서 현재 티벳불교계에는 판첸라마가 둘이다. 하나는 달라이라마가 지명한 후계자이고, 또 하나는 중국정부가 지명한 후계자이다. 그리고 달라이라마가 지명한 후계자는 해방불명 상태이다. 즉 티벳불교계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티벳독립을 포기하고 달라이라마와 절연하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요구이다.어쨌든 불교는 중국에서는 매우 영향력이 있는 종교이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은 매우 수준높은 도덕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진정하고 유일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중국과 티벳의 불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출처 : [기타] http://www.inbora.com/ez2k/ezboard.cgi?db=board3&action=read&dbf=1881&page=
유교와 도교
도교, 유교, 불교는 중국과 극동의 세 가지 주요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와 달리, 도교와 유교는 세계 종교가 되지 못하고, 기본적으로 중국과 중국 문화의 영향권 내에 머물렀습니다.
현재 중국 내의 신자 수에 관한 공식 통계는 구할 수 없지만, 도교와 유교는 함께 과거 2000년 동안 거의 세계 인구 4분의 1의 종교 생활을 지배해 왔습니다.
‘백화 제방, 백가 쟁명.’(白化齊放, 白家爭鳴: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듯, 많은 학자가 거리낌없이 자유로이 논쟁하는 일) 중국의毛澤東이 1956년에 행한 연설로 유명해진 이 말은 사실은 중국 학자들이 전국 시대라고 부르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중국의 한 시대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던 표현이었습니다. 막강하던 주(周) 왕조(기원전 1122년경-256년)는 그 무렵 결속력이 약한 봉건 국가 체제로 와해되었으며, 제후국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평민들에게 많은 고난을 안겨 주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고통 때문에 전통적 통치 계급의 권위가 심하게 약화되었습니다.
평민들은 더 이상 귀족들의 변덕과 계략에 복종하여 그 결과를 묵묵히 감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억압받던 사상과 포부가 “백화”처럼 피어났습니다.
다양한 사상 유파들이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부·법·사회 질서·행실·윤리 등에 관해서 그리고 농업·음악·문학 같은 주제에 관해서 나름대로의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유파들은 “백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유파가 매우 탁월하게 되어, 2000여 년 동안 중국인의 생활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유파는 마침내 도교와 유교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공자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중국의 또 다른 탁월한 현인으로, 그의 철학은 유교의 기초가
되었다.
도덕적 선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조상 숭배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사망한 조상의 영과 관련된 의례와 의식을 지킬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도교, 유교, 불교는 중국과 극동의 세 가지 주요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와 달리, 도교와 유교는 세계 종교가 되지 못하고, 기본적으로 중국과
중국 문화의 영향권 내에 머물렀습니다.
현재 중국 내의 신자 수에 관한 공식 통계는 구할 수 없지만, 도교와 유교는 함께
과거 2000년 동안 거의 세계 인구 4분의 1의 종교 생활을 지배해 왔습니다.
유교는 도덕적 선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조상 숭배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사망한 조상의 영과 관련된 의례와 의식을 지킬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교사이고 철학자이며 정치 이론가인 공자는 기원전 551년부터 479년까지 살았다.
성(姓)은 공(孔)씨였으며, 따라서 나중에는 “스승이신 공”을 의미하는 공부자(孔夫子)
로 불리었다. 영어로는 라틴어식 발음을 따서 “컨퓨셔스”라고 한다.
공자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공자는 다만 “자기가 태어난 땅에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조직하여, 그 분야의 책
들을 정리하고, 제반 의식 절차에 품위를 더하며, 도덕 규범을 강조하는 일을 한 것뿐
이다.”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사회 윤리학이었다.
그가 관직을 얻고자 했던 동기는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욕망 때문이었다. 따라서 큰 뜻을 품은 종교 지도자라기보다 좌절을 겪은 정치가
인 공자의 철학이 “유교식 사람의 길”로 일컬어진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공자는 당시 종교의 많은 부분이 미신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당시의 종교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대답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공자가 “하늘”을 의미하는 천(天)을 자주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가 단순한 비인격적 고등한 힘 이상의 무엇인가를 실제로 믿었던 것으
로 해석한다.
공자는 가정의 가치, 권위에 대한 존경 그리고 사회적 화합을 강조했다. 그는 남에게
봉사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개발하고 개인적 특성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공자는 인류 전반에 대한 자애, 특히 효도와 형제 우애를 의미하는
단어인 인(仁)을 강조했다. 그는 조상 숭배를 장려했다.
당시 현실적이고 이치적인 공자의 가르침이 미신적인 불교의 교리나 사상과 융합되기
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중국에 불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출처 - 종교문제에 관한 개인 연구 조사 자료
중국 종교
중국인의 기본사상은 도교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도교라기 보다는 노장사상이라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중국인의 기본품성인 노장사상이 있는 가운데 불교가 들어오게 됩니다. 불교는 노장사상을 통해서 해석이 되어지고 이를 격의불교라고 불리었습니다.
후에 불교가 좀더 많이 들어오고 이해가 깊어지자 불교가 불교자체로서 홀러 서게 됩니다. 한편 불교의 경전등이 속속 번역되고 대장경으로 완성되어 지는 가운데 중국의 노장사상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를 하게 됩니다.
종교적인 형태로 변화가 되고, 여러 말씀들도 정리가 되어서 도장(道藏)이라는 형태로 완성이 됩니다.
그 이후 서로 갈등을 빗기도 하고, 서로 협력을 하기도 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가게 되지요.
중국에서 현대에 도교라고 하는 종교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불교는 여러절에서 받아들여지고 신앙되어 지고 있으니 현재 중국의 다수 종교는 불교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도교가 종교적인 형태로 믿어지지 않는다 하여서 없어졌다고 생각하면은 안됩니다. 일반인들의 삶속에서 도교적인 사상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로 오랜 시간 동안 경쟁하고 영향을 미치다보니, 불교속에도 도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불교와 신도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듯이, 한국에서 불교와 무속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듯이,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도교를 종교적으로 찾으려고 한다면 지금은 거의 없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여러 종교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에서 1997년 10월 16일자로 중국의 종교 신앙 자유 상황 이라는 백서를 발간하였다. 그 내용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다종교 국가이다. 중국의 종교 신도가 주로 신봉하는 종교는 불교,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및 기독교가 있다. 중국의 공민은 자유롭게 자신의 신앙을 선택하고 표현할 수 있으며, 종교 신분을 표명할 수 있다. 불완전하긴 하지만 한 통계에 의하면, 중국은 현재 각종 종교 신도가 1억여명이 있으며, 종교활동 장소는 8만 5천 곳, 종교 교역자는 약 30만 명, 종교단체가 3천여개가 있는것으로 밝혀졌다. 종교단체는 또한 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종교 학교 74개를 운영하고 있다. 불교 중국에서 이미 2천년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불교사원이 약 1만 3천여 개가 있으며, 출가한 승려와 비구니는 약 20만명이며, 그 중 티벳계 불교의 라마 승려와 비구니는 12만명이다. 소위 산부처라는 활불은 1천700여명, 사원은 3천여개가 있다. 팔리어계 불교의 비구니, 장로는 거의 1만명에 이르고, 사원은 1천 6백여개가 있다.
◆ 도교
중국에서 발원하였으며, 1천7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는 현재 도교의 궁관이 1천5백여개가 있으며, 건도,곤도라 불리는 신도는 2만 5천여 명이 있다.
◆ 이슬람교
기원 7세기에 중국에 전래되었다.이슬람교는 중국의 회족, 위구르족등 10개 소수민족의 민중신앙이다. 이들 소수민족의 총인구는 약1천 8백만명이며, 모스크인 칭전스는 3만여 개, 이맘,아홍이라 불리는신도는 2만 5천여명이 있다.
◆ 천주교
기원 7세기부터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전래되면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대규모로 들어왔다. 중국의 현재 천주교 신도는 약 4백만 명 , 교역4자는 약 4천 명이 있으며, 예배당,회소(집회소)는 4천6백여개다.
◆ 개신교
19세기초 중국에 들어왔으며, 아편전쟁 이후에 대규모로 전래되었다. 중국에 현재 기독교인이 약1천만명이 있으며, 목회 사역자는 1만 8천여명이 있다. 예배당은 1만 2천여 개, 간이활동장소(집회 처소)는 2만 5천여개다 중국에서 전국적인 성격을 지닌 종교단체는 중국 불교협회, 중국도교협회, 중국 이슬람교 협회,중국천주교애국회 중국천주교주교단,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중국기독교협회 등이다. 각 종교단제는 각자의 규정에 의거하여 지도자를 선거하고, 지도기구를 결성한다. ■ 중국의 각종 단체 자주적으로 교무를 운영하고 처리하며, 또한 필요에 따라 종교 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종교 경전을 인쇄 발행하며, 종교 간행물을 출판하고, 사회공익 봉사 사업을 전개한다. 중국은 세계 여러 국가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원칙을 실행하며, 국민 교육중 학생들에게는 종교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일부 대학교 및 연구기구에서는 종교확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각 종교조직이 개설 운영하고 종교학교에서 각 종교의 필요에 의거하여 종교학을 전공으로 교육시킨다. 종교 교역자가 수행하는 정상적인 교무활동은 종교 활동 장소 및 종교 습관에 의거해 신자 자신의 집에서 행하는 모든 정상적인 종교활동으로 예를 들면 참배, 경전낭송, 예배, 기도, 경전 강해, 설교, 미사, 세례, 수계, 봉재, 종교절기 행사, 종부, 추도 등으로 모두 종교조직과 교도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며, 법률의 보호를 받고,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없다. 1966년부터 1976년 까지 발생한 문화대혁명 은 종교를 포함한 중국 사회 각 방면 모두에 대 재난이라 할 만한 파괴를 가져왔다. 따라서 중국의 각급 정부는 문화대혁명 의 과오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종교신앙 자유정책도 회복하고 정착시켰다. 대단히 큰 노력을 기울여 종교계 인사 중 억울하거나 착오로 누명을 쓴 자들을 복귀 복원시켰으며, 종교 활동 장소를 회복시키고 재개방하였다.■ 중국 정부 종교 광신을 이용하여 인민과 국가를 분열시키거나, 각 민족 사이의 단결을 파괴하는 민족분열주의를 단호히 반대한다.또한 종교를 이용하여 불법 활동과 공포주의를 조장하는 활동을 단호히 반대한다. 국가의 통일과 소수민족 지역의 사회 안정을 단호하게 지키며, 소수민족 종교신자들의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한다. 중국 정부는 국제 사회의 종교신앙 영역에서 공인된 원칙을 존중하며, 이런 원칙이 반드시 각국의 구체적인 상황과 서로 결부되어야 하며, 또한 각국의 국내 법률을 통해 실시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종교 영역에서 대항을 일으키는 거을 반대하며, 종교를 이용하여 다른 나라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 대혁명으로 소멸된 종교를 1980년대에 시작한 개혁 개방과 함께 부활시킨 중국은 정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회국 선교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삼자원칙 아래서 허용하고 있다. 미신의 열풍에 사로잡혀 있다. 1억 여명의 종교 신도 외에도 중국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각종 점, 역술, 관상 등 미신의 열풍에 사로잡혀 있다. 정치, 교육, 문화의 중심지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도 근래 몇 년 사이에 점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국가 중앙기구 등에도 역술하는자가 있다고 한다. 역술이나 점술에 빠지거나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과는 달리 소위 지식인들이 많이있는데 그들 중에는 심리학자나 천문지라학자도 있다. 최근 한 연구단체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총칭, 선전, 하얼빈, 홍콩 등 중국의 주요 7개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직접 만나 이들이 점을 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점과 운명에 대한 생각을 들어본 결과 , 도시에 거주하는 지식인 혹은 해외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조차도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는 사회주의적(?) 사고보다는 운명을 믿고 따른다는 숙명론적인 대답이 많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의 사진을 택사나 자동차 운전석 앞에 걸어 놓고 다닌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마오쩌둥 이나 저우언라이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복 주는 수호신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 신도뿐만 아니라 미신을 추종하거나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중국이 개방화되면서 부딪친 심각한 배금주의 현상으로 중국인들이 정신적, 영적으로 기갈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Friday, May 29, 2009
Friday, May 22, 2009
8) 불교 쇠퇴의 원인
이은구 저/세창출판사/1995.8.5
불교는 이미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제자들이 제1차 불전 결집을 할 때부터 두 파로 나뉘었다는 설이 있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에 이르는 동안 잡다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불교 내의 분파과정은 불가피했다. 불교는 불타가 죽은 뒤 계율을 엄격히 존중하는 교조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게 내려왔다. 그러나 제2차 불전 결집 때부터 이러한 종래의 경향에 비판적인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파작용은 아쇼카 왕의 통제로 당대에는 크게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계율과 일신의 해탈을 주로 하는 보수적 입장이 고수되어 제3차 불전 결집은 이 상좌부 불교를 정통화하는 선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진보적인 불교도 측에서는 불교의 경전을 자유로이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형식과 계율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보아, 일신의 해탈보다는 중생 제도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곧 대승불교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카니쉬카 왕에 의한 제4차 불전결집 때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는 여러 문화와의 수용과 사회발전에 따라 불교의 폭넓은 포용성이 필요하였던 시대적 요구의 결과라고 생각된다.그러나 인도에서의 불교 세력은 쿠샨 왕조의 복고적 브라만 보호 정책은 힌두교 발전에 고무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브라마니즘에 반기를 들고 개혁적인 종교로 발전해 온 불교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불교가 인도에서 확고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교의 침입에 따른 그들의 불교말살을 하나의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적인 요인이라 하겠고, 내재적인 요인은 다음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불교는 무신론에 그 바탕을 두고 브라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제식만능주의를 배격하므로 만민평등주의를 제창한 일종의 브라마니즘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종교였다. 그러나 인도라는 토양에서 배태한 불교는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관념인 윤회와 업사상을 받아들였다. 이는 신분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이즘의 중심사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신분제도를 무시하면서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던 불교의 평등사상이 빛을 잃고 만다.말하자면 브라만의 윤회와 업사상을 인정한 불교는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했고, 브라만의 신분제도와 이를 정당화해온 사상이 불타의 평등사상을 압도해 버렸다. 현세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살면 내세에는 더 좋은 상태로 태어난다는 업 사상이 신분제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어, 인도인들은 불교의 혁명적인 평등사상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고 불평등한 계급 제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불교는 카스트의 무의미함을 설하고 실제로도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분제도를 타파하는 사회개혁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말하자면 불교는 종교운동에 그치고 말았으며, 사회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국왕, 고급관리, 상인, 지주 등의 상류 계층에서 성장하고 발전한 도시형 종교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불교는 신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배의 대상도 없는 독자적인 종교였으나 그러한 상태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불타의 생존 중에 이미 신도 가운데는 그를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불타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후세에 와서 이러한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대다수의 다른 종교가 그러하듯이 불교도 몇 개의 종파로 분열된다. 그 중에서도 신도수가 많은 대승불교는 불타를 특히 신격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완강하게 거부한 형이상학적인 사상도 가미하였다. 우주에 천국과 지옥을 마련하고 성자(聖者)를 앉히고 또 향과 촛불과 성수(聖水)로 예배도 올렸다. 이처럼 신을 무시했던 초기 불교가 대승 불교에 와서는 불타를 중생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인식되면서 불교는 힌두이즘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불타를 사실상 신격화시킨 대승불교는 힌두이즘과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곧 불교가 서민 대중 속으로 파고 들게 했으나, 인도 내에서 힌두이즘에 융해되어 주체성을 잃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토착화라기보다는 불교의 힌두교에의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불타 자신이 완전한 신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된 것도 불교가 힌두이즘의 신관을 채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불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브라마니즘에 반기를 든 개혁종교로 출발하였다. 불교가 포교를 함에 있어도 브라만 계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느 한 지역에서만 두루 쓰이는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팔리어(마가디어)를 사용한 것은 브라마니즘의 전통에서 탈피하겠다는 불교의 정신과 불교가 발생한 마가다 지방의 역사적 환경을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팔리어 성전에 밝혀진 초기 불교는 어디까지나 비브라마니즘의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내려와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테라바다 불교에서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전환함에 따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소위 범어(산스크리트어)경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불교 문화가 비브라만 주의를 그 본질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브라만 문화에 이끌려 들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대승불교의 진언(眞言, mantra)과 다라니(dharani)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이 가미되어 7세기경에 홍성한 밀교(密敎)는 불교의 변질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불교가 힌두교의 샥티즘(Saktism)과 탄트리즘(Tantrism)의 영향을 받아 그 자체의 종교적 본질을 잃은데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쉬바나 비슈누 신에 대항할 근거를 상실했다. 게다가 대승불교는 철학적 깊이를 더하여 대중으로부터 실질적인 감화력을 잃게 된다.7~8세기에 이르러 불교에 위협을 주는 시대가 시작된다. 북인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는데, 특히 타밀에서는 힌두교 박티(bhakti) 신앙의 흐름이 도도한 대하를 이루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변모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박티 신앙의 흐름을 이어받은 비슈누파와 시바파의 성자들이 출현했다. 불교 본래의 생경하고 참신한 종교성이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에 대한 정열적 사랑을 역설하는 박티 운동의 출현은 남인도 불교의 쇠퇴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굽타 시대의 불교는 힌두신과 힌두의 주술적 의례를 대폭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독자적인 것으로 변용되었다기 보다는 힌두적인 관념이나 의례를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힌두적인 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힌두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힌두 세계에서 더 이상 이단적인 종교로서의 근거를 상실하여 불타가 비슈누의 권화(화신)로 간주되고 말았다. 현재 힌두교도들은 불타를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고 믿고 있어 그들에게 있어 불타는 힌두이즘의 주신 비슈누 그 자체인 것이다.비슈누의 신자들이 기원후 4세기경부터 불타를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틀림없이 불교가 독자적인 운동으로서 확립되는 데에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불교자체에서 창조적인 지성의 활력이 쇠퇴했다는 점일 것이다.불교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는 자이나교도 힌두의 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 응집력은 매우 견고한 것이어서,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으로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다. 12종의 통과의례도 확립되어 있었다. 자이나교도는 힌두세계 속에 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서의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자이나교 집단이 힌두세계에 정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불교도는 힌두사회 안에서 정착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탄트릭(tantric) 밀교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불교 본래의 깨달음과 거기에 근거를 둔 윤리적 삶의 종교성은 힌두교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불교의 독자적인 사상이 철학으로써 연구되거나 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불교도의 실천적 생활에는 그다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도로서의 연대감이나 교단 전체로서의 생활에 대한 강제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응집력 있는 집단으로 만들만한 요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의 침입이 북인도 불교의 쇠퇴를 채찍질하고 문화적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불교쇠퇴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던 것이다.마지막으로 불교에 불어닥친 치명적인 강타는 12세기에 일어났다. 수세기 전부터 인도에 들어와 있던 회교가 1197년에 와서는 드디어 불교의 마지막 거점을 침략했던 것이다. 8세기 이후에 터키계 이슬람 교도가 북서 인도에 진출하게 되는데, 11세기의 가즈니 왕조와 고르왕조 등도 북부 인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상을 혐오하여 아프가니스탄, 간다라, 카쉬미르 등지에서 불상의 얼굴을 깎아버리거나, 목을 치거나, 또는 사원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하여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쳐 벵갈과 비하르의 불교 사원은 이슬람 군대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경전이 소각되고, 건물이 파괴되었다.이런 연유로 해서 북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 걸쳐서 불교는 그 이전부터 내적인 이유로 힌두세계에 접근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마침내 힌두 세계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상실해 갔던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후일에는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였지만, 원래 불교의 근본적인 세계관은 인도 고유의 사상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이와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통해 전개되어 불교는 인도의 사상과 문화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인도사상의 커다란 물줄기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그래서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인도의 사상이라는 토양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 따라서 힌두교도에게 있어서 불타의 가르침은 모두 힌두교 안에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불교는 힌두교라는 큰 세계안에 하나의 움직임이었으며, 불교는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힌두교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는 종교였다. 그리고 불타의 가르침이 망각된 것은 아니다. 불교의 가장 귀중한 가르침의 대부분은 인도 사상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대 인도의 불교는 힌두교라는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생활문화에 관심을 두는 한,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사회 및 생활양식이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는 힌두교 ‘세계’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는 다른 종교라기보다는 같은 힌두교 중의 다른 종파로 간주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학문의 융성과 불교의 쇠퇴 힌두적인 여러 요소들과의 융합 강도를 더해가면서 불교는 8세기 이후에도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나간다. 인도각지에서는 불상이나 승원의 건립과 개축에 대한 기부 명문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비구 상가와 재가 신자 사이의 호혜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유품도 상당수에 이른다. 8세기 중엽부터 12세기까지 지금의 비하로 지방과 벵갈 지방을 지배하던 팔라 왕조 시대에는 밀교계의 불상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날란다를 비롯한 대사원의 번창했던 상황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불교는 점차 쇠퇴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밀교 경전이 많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남아있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원전은 없어졌다 해도 티베트어 번역과 한역으로 남아있는 경전의 수효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대부분은 의궤나 행법, 사상서적에 한정되어 있다. 서부 데칸 지역의 불교 석굴 조성은 대략 9세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고, 제13굴~제19굴에 이르는 힌두교 석굴은 6세기 중엽 내지 말엽에서 9세기를 걸치는 기간 동안에 질과 양이 모두 뛰어난 조각을 남겼다. 제30~34굴은 자이나교 굴로서 9~10세기에 속한다. 그리하여 기원 전 1세기 이후, 천년 가까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불교도들이 보여주던 석굴 조성과 벽화, 조각 등에 나타난 활력은 점차로 쇠퇴되어 갔던 것이다. 다른 지방의 승원이나 사당의 축조도 이와 마찬가지로 쇠퇴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굽타 시대와 그 이후 4~7세기의 명문에 비해서 8세기의 이후의 불교 명문은 현저하게 그 수가 줄어들었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경우에도 미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면의 충실한 정신성이 결여된 것이 많다. 이러한 상황은 모두 불교의 쇠퇴를 암시해 주는 징후들인 것이다. 반면에 규모가 큰 불교 사원의 융성은 실로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6세기 전반에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하여 창건된 날란다 사원은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의 보호에 힘입어 점차적으로 확장된 결과, 7세기에 이르러 현장에 체류했을 무렵에는 많은 승원과 탑, 예불당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대사원’되어 있었다. S.닷트교수는 약 200개의 촌락이 사원에 기부되어 경제적인 기반의 구실을 해주고 있었던 점을 기술하고 있다. 현장과 의정 등, 중국 승려들의 기술이나 그 밖의 자료에 의하면, 여기서는 단순한 불교 철학 외에도 각종 베다의 연구에서부터 문법과 음운학, 천문학, 의학이나 바라문계 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날란다는 당시 학문의 일대 센터로서 입학 자격도 정해져 있었으며, 광범위한 연구 활동을 바탕으로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날란다 사원이 가지고 있는 학문 사원적 성격은 8세기 이후에 주로 팔라왕조에 의하여 건립된 사원 대학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8세기 중엽의 고팔라왕은 팔라 왕조의 창시자이며, 그의 왕가는 탄트릭 밀교의 신자였다. 고팔라왕은 날란다 대학에서 9km쯤 떨어진 지금의 비하르샤리흐 거리에 오단타푸리 사원을 창건했다. 한편 바가르푸르 시가가 이에 있다고 하는 비크라마실라 사원은 다르마팔라왕이 건립한 것으로 밀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아티샤(982~1,054)는 이곳에서 공부한 후에 티베트로 돌아가서 티베트 밀교를 개혁했다. 마히팔라 1세의 전성기였던 11세기에는 소마푸리 사원도 이미 벵갈 지역의 학문 센터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자갓다라 사원문 센터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자갓다라 사원도 11세기 중엽에 라마팔라왕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방글라데시 소재 치타공에 있었던 판티타 사원에도 많은 학승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불교에서 학문이 크게 번성했었다는 사실은 적잖은 학자들의 이름이나 논서로서도 알 수 있다.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샹카라를 비롯한 힌두계 사상가들과의 논쟁이 한창이었다는 사실도 불교의 학문적 발전이 힌두교의 학문 연구와 동일한 수준에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불교가 일반 서민들과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으며, 또 어느 정도 일상생활 속에 신선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던가 하는 문제는 확실치 않지만, 학문이 번성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불교는 이 시대에 이르러 학문화되었다거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S.닷트 교수는 힌두교도인 굽타의 역대 왕들이 날란다를 비롯한 불교의 대사원들을 보호한 가장 큰 이유의 하나로, 이러한 불교 사원이 불교뿐만 아니라 점차로 당시의 일반적인 학문 연구 센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점을 들고 있다. 규모의 사원 대학은 모두 왕가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 많은 학승들이 모여 있었다. 중국 승려들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티베트의 학승들도 많이 운집해 있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7세기 전반의 티베트에는 손첸 감포왕이 나타나 각 부족을 통합하여 지배권을 잡은 다음 인도로부터 불교를 도입했다. 또 인도 문자를 모방하여 티베트 문자도 만들었다. 왕은 인도로부터 유명한 학자를 초청하고, 또 인도로 유학승을 파견하는 등, 불교의 진흥에 진력한 결과, 인도 불교는 도도히 티베트로 유입되어 정착의 길을 닦아 나갔다. 대승논서나 밀교 경전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으며, 또 직접 티베트에서 저술된 것도 많았다. 이와 함께 원시 경전이나 초·중기의 대승 문헌도 소개되어, 티베트어 번역 문헌은 한역 문헌과 더불어 불교 연구의 일대 보고(寶庫)가 되었다. 비하르와 벵갈의 대규모 사원 대학은 이러한 티베트 불교와의 중요한 교류 무대였다. 동시에 당시 불교 센터였던 북서 인도와 캐시미르 지방도 인도 불교와 중국 및 티베트 불교와의 교류 거점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8세기 후반에 티베트의 치손 데첸왕은 날란다의 저명한 학승 샨티라쿠시타(寂護)를 초청하고, 북서 인도의 우디야나에서 파드마삼바바(연화생,蓮華生)도 초청한 바 있다. 후자는 주술에 능한 자로서 티베트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극복하고 티베트 불교의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중부 인도에서도 불교가 각가지 형태로 신봉되고 있었음은 몇몇 단편적인 자료들이 나타내고 있는 상황으로 미루어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마히팔라 1세 대인 1,026년에는 파괴되어 있던 사르나트의 사원이 복구되었고, 11세기 초엽에는 보드가야로부터 찾아 온 중국 승려들에 의하여 많은 불탑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번영했던 불교는 필시 밀교 계통의 불교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면에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불교권에서도 보드가야를 비롯한 순례지를 위주로 하여 인도 불교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세나 왕조의 자야제나왕은 13세기에 보드가야의 금강보좌에 한 촌락을 기부하고, 삼장에 통탈한 스리랑카의 승려 망가라스바민을 그곳에 데려 왔다. 그들은 밀교를 몹시 싫어했다고 하는데, 마침 인도를 순례하고 여행기를 남긴 티베트의 승려 추 제페(다르마스바민)을 만나 반야경을 버리라고 강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나 현세 이익적인 차원에서나 다소나마 주술성을 띤 의례가 흔히 쓰이고 있어서, 유신론적인 경향이 짙었던 대승불교와 원시 부파불교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남방 상좌부와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따금씩 충분한 만큼의 상호 이해를 결하고 있는 수가 있다. 후자는 대승불교를 가리켜 선정, 염불, 가지(加持), 기타로 대표되는 깨달음의 차원을 전승하지 않은 주술적 복합체라고 비난하며, 심지어는 불교가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한편 대승불교 측에서는 남방 상좌부를 가리켜 계율에만 맹종하는 형식화된 불교라 하여 이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모두 스스로가 전승한 고차원의 출세간적 차원에 입각해서 상대편의 세속화된 부분만을 지적한 발언이다. 망가라스마민과 다르마스바민과의 대결은 남전과 북전의 대립이 이미 13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학문 연구를 핵심으로 한 불교의 전통은 그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이미 그 존재의 실체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대략 12~13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교도의 불교 박해는 드디어 인도 불교의 종말을 분명한 형태로 매듭짓고 말았던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나?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인도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 불교의 발상지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발상지인 인도에 가보면 인도 불교의 위치는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 모든 불교 유적지는 외국인들의 발길만 이어 질뿐, 인도 불자들의 방문은 거의 없다. 물론 인도에서는 초라하고 볼품없으나,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 불교는 국교로서 혹은 토착신앙으로 많은 신자와 포교활동으로 큰 위세를 떨치고 있기는 하다. 모든 종교나 스포츠에 있어서 최초 발상지는 큰 영향력이나 위세를 가지고 있다. 축구의 발상지(영국), 야구(미국), 유도(일본), 태권도(한국)등 뿐만 아니라, 유교, 이슬람등의 발상지를 보면 영향력이나 위세를 알 수 있다.인도에서의 불교의 위치를 살펴 보면, 83%의 힌두교, 12%의 이슬람교, 2.5%의 기독교, 2%의 시크교에도 못 미치는 제5위 0.7%(6백만명)에 불과하다. 인도 외부에서의 위치와 영향력에 비하며 한없이 초라한 실적이다. 왜 인도에 있어서 번영을 구가하던 불교의 위치가 송두리채 사라져 버렸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불교의 탄생: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인 석가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 네팔 지방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 29세가 되던 해에 출가를 한다. 당시 인도에는 토착 민속 신앙인 바라문교가 있었고, 바라문교에 뿌리를 두는 불교를 비롯하여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등이 파생하게 된다. 석가는 그후 6년간의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인 수행에 전념하며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해탈에 이르게 된다.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의 종교, 석가모니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종교이다. 그러나 초기의 원시불교는 개인의 수행을 중심으로 부처가 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후에 수행방법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뉘게 된다.불교의 흥망성쇠:
원시 불교는 초기 일반 대중으로부터 선풍적 인기를 얻으면서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기원전 317년 찬드라굽타에 의하여 세워진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Mauria) 제국의 후원에 힘입어 불교는 아쇼카 왕 시대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4세기초에 힌두적 색채가 강한 굽타 왕조의 등장으로 불교도가 급속하게 줄어 들고, 곧이어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고, 1203년 비크라마실라 대사원이 이슬람 군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고, 교단의 쇠퇴와 함께 1600년의 전통을 지닌 인도 불교는 막을 내린다.인도 불교가 쇠퇴한 이유:1) 힌두교와 차별성을 부각하지 못함:
바라문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힌두교와 불교는 상당히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에 초기 대중으로부터 거부감없이 불교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수행방법, 내세관, 신의 형상등의 힌두교와의 유사점이 많은 것이 초기 전파에 유리하였으나, 결정적으로 불교가 힌두교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부각시키지 못한채 신자들을 힌두교로 회귀하게 되는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2) 수행방법이나 참선 등 힌두교의 아류로 취급됨:
불교 용어인 윤회나, 업, 해탈등은 사실 힌두교의 개념이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 업, 해탈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사상은 석가모니에 의하여 체계화되었지만, 결국 힌두교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중들의 인식을 벗어 나지 못 하게 된다.3) 반 카스트제도의 도입 실패:
초기 불교는 카스트 제도를 반대하는 등 대중으로부터 선풍적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사회 대중에 대한 설교보다는 개인의 수행방법을 더 중시하던 당시 교단으로서는 사회적 문제인 카스트제도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 한다.
따라서 참신하고 혁명적이고 현실적인 삶에 무게를 두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바라던 대중으로서는 불교의 이중성에 등을 돌리게 된다.4) 이슬람교의 흥기:
불교의 초기 전파는 갠지스강변을 중심으로 주로 인도 북부 지역을 근간으로 이루어 지게 된다. 그러나 불교의 주무대이던 이 지역은 4세기 이후 이슬람을 등에 업은 굽타 왕조, 무굴제국등의 등장으로 근거지 자체를 잃게 되면서 불교가 쇠퇴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5) 국교로써의 채택:
마우리아 왕조이후에 인도에서 불교를 신봉하는 왕조가 생겨 나지 않음으로써, 결정적으로 인도 불교가 쇠퇴하는 큰 요인이 된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불교가 크게 흥성한 이웃 나라인 미얀마, 캄보디나, 태국, 스리랑카, 티베트 등의 예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 난다.이상과 같은 요인이 인도에서 불교를 쇠퇴하게 만들고 초라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사후, 초기 불교의 대중적 인기에 너무 안주한 나머지 대중에게 다가 가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제일 큰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중의 입장에서 신흥 종교를 전파하고 설교하는 방법등도 제도적으로 상당히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지금 잘 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한번 더 박차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7. 인도불교의 쇠퇴와 현재
불교의 힌두화
굽타시대 이후의 불교가 보여주는 현저한 특징으로는 불교문화 속에 스며든 많은 힌두적 요소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힌두교 속에 투영된 불교의 영향도 찾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힌두교
속에 투영된 불교의 영향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불교는 한편으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힌두 사회 속에 안정된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불교에는 예배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멸 후 불타는 점차 법륜. 보리수. 족적(足跡) 등을 통해 상징적인 형태로 숭배를 받았고, 불탑과 불상이 출현하자 불타는 숭배의 대상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어서 대승불교 시대에는 여러 불타와 보살 관념이 정착되어 유신론적 신앙형태로 성립되어 갔습니다.
굽타왕조 이후에는 당시의 힌두교도가 신봉하던 여러 신들이 대량으로 불교에 유입되어 불교문화 속에 갖가지 기능을 갖고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신론적 경향에 따라 힌두 사회에서 사용되던 여러 가지 주술적 요소, 주문 등이 불교화 됩니다. 다라니와 만트라도 그 한 예이며 밀교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불교가 항상 반대하던 카스트제도에 대해서도 점차 비판하지 않게 되며, '불타는 고귀한 가문에서 나온다'고 한 경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교가 힌두화 됨으로써 불교는 힌두사회 내부에 안정된 지위를 구축하게 됩니다. 불타가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받들어지거나, 불타 공양일이 인도 사회에 정착되어 마치 불교가 힌두교의 한 종파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밀교
불타는 주술을 비롯한 브라만의 종교의례를 부정하였으니, 이것은 초기 교단의 기본적 성격의 하나였습니다. 불교의 주된 지지자 층이 도시를 중심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종래와 같은 주술적인 농촌 사회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농촌 사회에로 침투해 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힌두이즘의 형성 과정에서 브라만의 종교의례에 토착신앙이 포섭되었다는 것은 대승불교에도 상당한 자극을 주어 불교 경전에도 의례적, 주술적 신비주의적 색체가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475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대서방 무역이 쇠퇴하여 불교를 지탱해 온 상업사회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농촌사회에 기반을 가진 힌두이즘이 크게 발전. 부각되며,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도 신비적 의례적 색채를 한층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밀교입니다.
밀교의 정의는 여러 각도에서 논의될 수 있으나 일단 '대승불교 사상이 예배. 의례, 만트라, 만달라 등의 형태로 구상화되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행법(行法)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교에서는 우주의 진실(法)을 대일(大日) 여래로 파악하며 그 몸(身), 말(口), 마음(意) 으로 표현되는 진실(三密)을 수행자의 몸. 말. 마음에 일치시켜 성불을 꾀합니다. 이를 위해 만트라와 만달라를 이용하여 의식을 집중시켜 진실을 명상함으로써 불타와의 합일을 도모합니다.
밀교의 발전 단계는
1) 세간 차원의 주술적 관념과 의례가 전통화되어 가지만 아직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행법으로 승화되지 못한 4-7세기의 밀교이전 단계를 '잡부밀교(잡밀)'라 합니다.
2) 주술적 관념과 의례가 승화되어 깨달음과 직결되며, [대일경], [금강정경] 등의 대표적 경전이 저술되는 7-8세기 후반의 밀교를 '순수밀교(순밀)'라 합니다.
3) 8세기 후반부터는 탄트라 밀교가 성립합니다. 이것은 요가행법을 통해 신비적 체험을 얻어서 절대자와 합일하려는 힌두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수행 과정에 남녀의 성교가 행해지기도 합니다. 탄트라 밀교는 기본적으로 힌두 탄드리즘과 동일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인도 불교 발전의 최후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본질인 열반이나 출세간적 차원의 의례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힌두 탄트리즘과 동질화 되었을 때 불교는 불교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힌두세계로 흡수되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쇠퇴
힌두적인 여러 요소들과의 융합 강도를 더해가면서 불교는 8세기 이후에도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각지의 불상이나 승원의 건립과 개축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경전 제작은 주로 밀교경전으로 그 대부분은 의궤나 행법, 사상 서적에 한정되며, 서부테칸 지역의 불교석굴 조성은 대략 9세기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불상. 보살상의 경우에도 내면의 충실한 정신성이 결여된 것이 많습니다.
반면에 규모가 큰 불교 사원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5세기 전반 창건된 나란다 사원은 점차 확장되었으며, 여기서는 단순한 뷸교철학 외에도 광법위한 학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사원이 건립되어 학문이 크게 번성했었습니다.
대규모의 사원대학은 모두 왕가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 많은 학승이 모여 있었습니다. 당시의 불교가 일반 서민과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상 생활 속에 어느 정도 진정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던가는 의문입니다.
8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북서인도에 진출하였는데, 11세기에는 다시 몇 왕조가 북부인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칸, 간다라, 캐시미르 등지에서 불상의 얼굴을 깍거나 목을 치거나 사원을 파괴했습니다. 그리하여 12세기 말엽 - 13세기에 걸쳐 불교사원은 이슬람 군대의 침공으로 파괴, 소각되고 승려는 살해 또는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고대 인도의 불교는 급속히 그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이슬람의 침입이 북인도 불교의 쇠퇴를 채찍질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이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불교는 탄트라밀교 이후 독자성을 상실하였으며 불교도로서의 연대감이나 교단 전체로서의 생활에 대한 강제력이 없어 응집된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힌두세계에 정착, 생존하지 못하게 됩니다.
북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 불교는 내적인 이유로 힌두세계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마침내는 힌두세계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상실해 갔던 것입니다. 이슬람의 침략을 받지 않은 남인도와 기타 각지의 불교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힘을 잃고 소멸되어 갔습니다.
현재
현재 힌두의 신앙 속에는 불교적 사상이나 실천의 영향과 자취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와 아샘 그리고 버마의 아라칸 지방에는 현재까지도 밀교계통의 집단이 존속한다고 합니다.
1951년 조사에 의하면 인도 총인구의 0.5%인 약 18만명이 불교도였습니다. 그 뒤 1956년 이래로 B.R. 암베드카 박사의 주도하에 불가촉천민 계층인 마하르족이 집단개종을 행하여 350만명의 신불교도(Neo-Buddhist)가 탄생하였습니다. 개종한 그들은 힌두교의례 대신 불타를 예배하고 불교 의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인도에 있어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대 불교는 왕족과 부호 등 사회 특수 계층의 종교였습니다. 생산계급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천시되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착취당하고 있었고, 한편 비생산계급들은 생산계급에 기생하면서 사회적 특권과 물질적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인평등과 고통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외치며 출발했던 불교는 여러 번에 걸쳐 자기 변혁을 시도하지만 끝내 인도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상류층의 종교로서 민중의 고통 위에 풍요로운 생활을 엮어왔던 것입니다. 인도의 찬란한 불교문화의 그늘에는 수많은 민중들의 고통과 한숨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도불교의 침체와 중국불교
1. 인도불교의 침체와 수난
인도불교의 쇠퇴하게된 것은 이슬람교가 침입해서 불교의 사원과 유적을 파괴한 행위 때문이다. 밖으로는 이교도들의 파괴적인 침범 행위와 안으로는 인도 바라문교의 타종교 흡수 수용하면서 불교는 바라문교와 점점 동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리하여 인도불교는 안으로는 바라문교와 동화되고 밖으로는 이교도들의 강한 침입을 맞이하면서 일대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슬람교가 인도에 침범한 이후로는 불교가 인도에서 서서히 떠나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걸쳐서 세계종교로 성장하면서 또 다른 불교의 면모를 보이게 된 것이다.
2. 중국불교의 13종
불교는 인도를 떠난 후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전통을 세웠다. 그 예를 하나 든다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는 종파중심의 불교로 나타나기 시작 했다. 부파와 종파의 차이점은 부파는 불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특수한 집단이라면 종파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불교단체라 할 수 있다. 종파에서도 경전을 연구하고 이념을 세워 그에 알맞은 생활양식을 수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부파에서 보다는 중심인물(종주)의 영향력이 더 크게 나타난다.
어떤 특수한 인물이 어느 이념을 가지고 불교의 전통을 수립할 때 그 인물 중심으로 종도(宗徒)들이 추종해서 새로운 규범을 조성하며 그 전통을 계속 계승해 나가는 것이 종파불교의 특징이다. 이러한 종파가 중국에서 많이 발달 했는데 그대표적인 종파를 보통 중국불교의 13종(宗)이라 한다.
그 13종은 (1)구사종(俱舍宗) (2)성실종(成實宗) (3)삼론종(三論宗) (4)섭론종(攝論宗) (5)열반종(涅槃宗) (6)천태종(天台宗) (7)법상종(法相宗) (8)지론종(地論宗) (9)진언종(眞言宗) (10)정토종(淨土宗) (11)계율종(戒律宗) (12)화엄종(華嚴宗) (13)선종(禪宗)이다.
이런 13종의 성격을 간략히 살펴보면 첫째 구사종은 소승불교의 논서를 체계 있게 연구하는 종파이다. 그 다음 성실종, 삼론종, 섭론종, 지론종은 다 대승불교의 논서를 연구하는 종파이다. 그 다음 열반종은 대승경전 중 열반경을 중심 교리로 하여 세워졌으며 화엄종은 화엄경을 중심경전으로 성립되었다. 법상종은 불교를 인식론적인 학문으로 체계화한 종파이며 계율종은 불교에 있어서 계율 면을 크게 강조한 종파이고 진언종은 비밀불교 의식을 계승한 종파이다. 정토종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염원하며 아미타불을 신앙하는 종파이고 선종은 참선수련을 근본으로 하는 종파이다. 이중에서도 천태종, 진언종, 정토종, 화엄종, 선종은 많은 영향력을 나타낸다. 이들 종파를 한국불교와 관련지어서 몇 가지만 고찰해 보겠다. 이점에 있어서 제일먼저 언급 할 수 있는 것은 화엄종이다. 화엄종에서 기본경전으로 하고 있는 화엄경은 매우방대하고 체계도 우람하여 불교의 총서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화엄경은 중국에서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선양하였다. 중국의 많은 스님들께서 화엄정신을 체계화하고 보급하는 일에 몸 바쳐 왔다. 이리하여 중국의 화엄종은 아주 풍부하게 발달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의상(625-702)대사께서도 중국에 가서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신바 있다. 의상스님은 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600-668)대사로 부터 화엄의 학문과 체험에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의 위치에 해당하는 스님이시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중국에 계속 계시지 않고 신라에 돌아왔기 때문에 중국 화엄종 전통은 의상스님으로 되어있지 않으나 사실상 중국 화엄중은 우리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바 있다. 그리고 선종에 대해서 약술해 보면 중국불교에 있어서 선종, 즉 선불교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불교의 특징인 동시에 동북아시아 불교의 특성이라고 할 만큼 애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 불교의 선중은 발달 과정에서부터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큰 의미를 간직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중국불교의 13종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중국불교의 13종 종파도 인도불교에 있어서 부파 불교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별로 세력을 떨치지 못하는 종파가 있었는가 하면 끝까지 종파불교의 특징을 전체 불교로 보급하는 종파도 있었다. 예를 들면 13종중에 선종, 화엄종, 천태종, 정토종 등과 같은 종파는 전 중국 불교계를 대표할 정도로 두루 보급된 종파이다. 이들 종파들은 서로서로 고리와 사상을 받아들여 혼용해 왔었다. 이러한 13종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발달한 불교는 우리나라에 거의 다 그대로 들어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 가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종파가 형성되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인도, 중국, 한국, 일본불교의 전체적인 역사 과정에 나타난 개요라 할 수 있으며 오늘에 와서는 이러한 불교를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소승불교, 둘째 대승불교, 셋째 비밀불교, 넷째 선불교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민중과 멀어지고 차별성 없어 힌두교에 ‘흡수’
인도불교란 일반적으로 부처님 이후 이슬람교의 침입 이전까지 인도에 존재했던 불교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은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의 승가교단이 소멸하여 이미 종교로서의 독립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도에서 불교가 쇠멸한 원인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슬람교도의 침입에서 원인을 찾는다. 물론 그것은 인도불교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외적 요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불교와 같은 처지였던 힌두교나 자이나교가 지금도 살아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서만 17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인도불교가 쇠멸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인도불교 안에는 자기 붕괴를 초래할 다양한 내적 요인을 이미 간직하고 있었지 않을까. 그래서 인도불교가 쇠멸하게 되는 내적 원인들을 찾는 데에 주력하고자 한다.
<사진설명> 대중과 견리된 불교는 점차 인도에서 자취를 잃어갔다. 사진은 산치대탑 주변 승원이 부서진채로 전해오는 모습
부처님은 주력(呪力, mantra)을 배척했다. 주력은 악마를 퇴치하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본질은 악마를 퇴치할 수 있는 신에 대한 기도와 찬송에 있기 때문에 불교는 악마와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도불교는 초창기부터 왕족 계급과 자산가인 상인 계급(長者)들의 후원과 보호 아래서 성장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멸의 양날의 칼로 작용하여 불교쇠퇴를 가져오는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게 된다. 왕족 계급과 새로이 등장한 상인 계급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여전히 베다 이래 주력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에 더욱 강렬해졌다. 불교의 후원세력이던 왕족의 세력이 확대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불교 승려들이 불교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주력과 각종 의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불교의 성격을 부처님 당시의 무신(無神) 사상에서 유신(有神) 사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였겠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지키고 불탑을 세운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한 대승사상은 마침내 우상으로 불상을 숭배하는 사상과 관습을 낳게 된다. 이것은 2세기 초에 일어난 간다라 미술의 불상 제작으로 더욱 조장되었다. 이러한 불상의 제작을 배경으로 우상 숭배에 따르는 유신 사상이 주력을 중시하고 각종 의례를 배태시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력 전 3세기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 왕, 서력 전후의 꾸샤나 왕조의 까니쉬까 왕 때 인도불교는 나름대로 꽃을 피웠다. 아쇼까 왕은 전국 각지에 불교를 전파하고 탑을 세웠다. 그런데 이렇게 전파된 불교는 이미 민중 사이에 깊이 침투해 있던 주력과 각종 의례와 습합함으로써 도리어 불교 자체가 브라흐만화(brahmanization)로 촉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꾸샤나 왕조 때 불교를 지탱해 온 주된 기반은 서방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사용한 화폐에 부처님의 이름이나 불상이 들어 있는 것은 거의 없고, 그리스와 로마, 이란 그리고 힌두교의 신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당시 불교가 ‘부처님’ 중심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슬람교도 침탈이 승가교단 소멸 결정적 요인
굽타왕조 힌두교를 국교로…사회 기반 더 약화
이러한 사실들이 인도불교가 쇠멸하는 원인(遠因)이라면, 좀 더 근인(近因)은 굽타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력 후 320년에 건국한 인도의 굽타 왕조는 서방의 서로마제국과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상인 계급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이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굽타 왕조는 힌두교를 국교로 하여 브라흐만 문화를 부흥시킨 왕조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힌두 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힌두교의 성장이 불교의 사회적인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불교교단에서는 중관, 유식학파와 불교논리학파 등의 학문적 성과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인도의 중심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불교의 후원 세력이던 상인계급의 몰락과 함께 국가재정의 빈곤을 가져 왔다. 다른 한편으로 농촌에 기반을 둔 브라흐만 세력이 부활하게 된다. 이는 주력에 바탕을 둔 브라흐만 사상, 즉 힌두교 사상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힌두교는 샥띠(akti, 性力) 숭배가 활발해져서 쉬바 신을 숭배하는 쉬바파(aiva)에 속하는 힌두 딴뜨리즘(tantrism)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흔적은 인도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 일컫는 아잔따, 엘로라, 카주라호 등에 새겨진 무수한 성교상(性交像, maithuna)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미술이 그리스적 사고에 기반한 간다라 양식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인도적인 사고에 의한 굽타 양식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불교의 힌두화를 촉진시킨다. 굽타양식의 불상에는 여러 가지 무드라(mudra-, 印契)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밀교 사상에 따라 주력을 주장하는 우상숭배가 은밀하게 승원의 깊은 곳에서 행해졌다는 증거이다.
굽타 시대 힌두교의 지배적 위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아 인도불교의 교단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대승을 따르던 재가자들도 인도 일반의 민간신앙과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다라니(dha-ran.1-), 무드라(mudra-), 만다라(man.d.ala) 등을 신앙방식으로 채용하여 여러 의식을 통해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불교의 다른 발전 양상인 밀교의 성립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주력을 중심으로 한 다라니 경전이 제작되게 된다.
지배층 후원은 ‘대중지지 상실’ 부메랑 작용도
출가자 중심-교의 전문화 등 민중 생활과 괴리
힌두 딴뜨리즘의 의례와 교의 내용을 많은 부분에서 채용한 밀교의 교의는 불교 고유의 특징을 상실하게 됐고, 동시에 불교가 힌두교에 동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밀교가 성립되는 계기를 단순히 힌두교와의 습합에서만 찾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기 시작했던 다라니 등의 주력은 밀교의 뿌리로서 인정되며, 더 나아가 인도사상의 일반적 토양에서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밀교의 성립은 인도불교의 쇠멸을 앞당기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사적 실체가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부파시대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성립된 다불(多佛) 사상, 삼신불설(三身佛說) 등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역사적인 인물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불보살들이 등장함으로써 힌두교의 신격들에게 접근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급기야 석가모니 부처님이 힌두교의 만신전 속으로 편입되어, 현재 인도에서 부처님은 힌두교의 한 신격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출가의식을 거친 승려들도 다시 재가자와 같은 위치로 돌아갈 만큼 교단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이는 교단의 지적 활동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로, 밀교교단에서 출가비구는 주술사 내지 마법사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힌두교의 쉬바교(aivism) 또는 비슈누교(vais.n.avism)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한편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이전에 조성된 석굴사원의 많은 조각품에서도 불교가 힌두세계로 흡수되어 가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잔따의 석굴사원에 있는 보살상처럼 7세기 이후의 많은 보살상들에게 브라흐만의 권위를 부여하려 했다. 또한 이 시대의 대승불전은 ‘부처님은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다’라고 단언하며, 계급제도를 당연한 것으로서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론적으로는 대승을 표방했음에도 보살수행보다는 불법(佛法)에 대한 논의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재가자 중심에서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전환되고, 또한 교의가 전문화됨으로써 사실상 민중의 생활과 괴리되고 말았다. 실천적으로는 유신론적 경향의 타력신앙을 강조했던 대승의 입장이 갈수록 세속화되어, 마침내 힌두교의 사회체제 속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고, 쇠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마지막 보루였던 승원들이 11~13세기에 걸쳐 침입해온 이슬람교도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들이 학살됨으로써 불교는 더 이상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추기에 이른다.
불교가 쇠멸하는 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이슬람교도의 잔혹한 침탈이지만, 그 이전에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어, 이미 불교가 힌두교 속으로 매몰되어 버렸던 것이 인도불교를 쇠멸케 한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도의 근현대 사상가인 라다끄리쉬난(1888~1975년)의
“인도에서 불교가 쇠멸하게 되는 근본원인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비슈누교, 쉬바교, 딴뜨라 신앙 등과 같은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불교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라고 한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50.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 민중과 단절된 불교…승원에 갇혀 ‘몰락’ <아잔타 석굴> 사진설명: 아잔타 석굴 같은 훌륭한 석굴은 있어도, 그런 석굴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현재 인도불교의 모습이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랐던 부처님의 땅 인도.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퇴하게 됐을까. 기원전 5세기 탄생돼 1천년 동안 사상적·문화적·종교적으로 인도대륙을 쥐락펴락 했던 인도불교. 인도불교를 발전시키고, 쇠미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동인도에 있던 밀교의 본거지 비크라마쉴라사(寺)가 1203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면서 역사적으로 인도불교는 최후를 맞는데, 한때 ‘불교’ 인도라고 불려지던 인도의 불교가 13세기 이후 무엇 때문에 인도의 ‘한미한 불교’로 전락해 버렸을까. 지난해 3월5일 인도 뭄바이에 도착, 칸헤리 석굴에서 취재를 시작하며 가졌던, 아니 출발하기 전부터 줄곧 품어왔던 “인도불교는 왜 쇠퇴했는가”하는 의문은 엘로라·아잔타·산치 유적을 보는 동안 더욱 커졌다. 아잔타 같은 세계적 유산을 남긴 인도불교가 사라졌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천여 년 동안 망각 속에 있던 아잔타 동굴은 햇빛을 보았는데, 아잔타를 만든 불교는 인도에서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단 말인가.” 한탄만 나왔다.
바이샬리·쿠시나가라·붓다가야·파트나·쉬라바스티·룸비니 등을 취재하는 동안에도 ‘그 원인’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인도의 ‘나란다 유적’과 파키스탄의 ‘탁실라·페샤와르 유적’을 답사하는 동안에 이유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카필라바스투 궁성 유적으로 간주되는 네팔의 틸라우라코트 유적에서 진행된, 힌두교도들의 의식을 참관하는 사이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든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이슬람의 동점’이 불교쇠퇴의 주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같은 ‘이슬람의 칼’ 속에서 힌두교는 존속하고 불교만 사라졌다는 것은 무언지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가자 응집할 독자적 의례없어
인도대륙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과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대략 이렇다. 인도불교 쇠퇴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불교의 학문화”다. 5세기 전반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나란다대학이 창건됐다. 7세기 당나라 현장스님이 도착했을 당시 나란다는 이미 예불당, 승원, 탑 등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일반사회와 유리된 대 사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불교가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나란다에서의 토론과 공부를 통해 ‘불교는 학문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8세기 9세기 10세기를 거치며 불교는 점차 거대한 승원 안에서,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비호를 주로 받으며, 일반과 유리돼 갔다. “학문연구를 핵으로 하는 이러한 불교는,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의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존재의 실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일본 나라 야스아키 교수).” 승원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자기들끼리의 지적 유희에 빠져있는 사이 대중들은 불교에 등 돌리고 힌두교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다대학과 비크라마쉴라사 등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사원에 있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인도불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대중적 지지가 없는, 대중의 생활에 지침이나 도움을 주는데 인색했던 ‘학문적 불교’의 예정된 말로였다고나 할까.
물론 ‘불교의 학문화’만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보다 직접적인 것은 재가조직의 결여, 포교에 대한 열망이 수그러든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불교가 출세간의 종교로 사회와 단절된 교단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출가조직을 도울 재가조직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불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 있었다. 그런데 불교만 사라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인도 보팔 부근의 파우니 스투파 터> 사진설명: 불교 스투파가 있었던 곳에 힌두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는 나란다나 비크라마쉴라사 같은 거대한 승원을 갖고 있었으며, 돌이나 벽돌로 건조된 승원들은 견고한 장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스님들은 모두 누런 가사를 입는 등 보통 사람의 복장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이 정연하게 걸식하는 모습은 군대를 연상케 함으로써 침입자인 이슬람교도들의 적개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민중의 종교로, 일반인의 사회생활 속에 완전히 용해돼 있었다. 신상(神像)을 모시는 사원도 규모가 작고, 소위 ‘교단조직’이란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힌두교를 멸망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셈이 된다. ‘이슬람의 칼’도 힌두교를 멸망시킬 수는 없었으며, 불교를 멸망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힌두교를 도운 셈이 됐다.”
인도불교의 쇠퇴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중 하나가 ‘불교의 힌두화’다. 불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불타의 세계〉 등에 의하면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 ‘힌두세계 속에 제대로 정착한 불교도’ 집단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교가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 밖에 독자적 집단으로 존재하지도 못했다. 불교도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응집시킬 ‘독자적인 생활규칙이나 통과의례’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의례다. 출가자들은 승원 안에서 자기들의 규칙에 의거해 수행하면 되지만, 재가자들은 의례에 의해 불교 신도가 되고, 의례에 참여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불교에 대한 신심도 깊어간다.
그런데 불교는 굽타시대(기원후 320~500) 이전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독자적인 의례가 없었다. 힌두교 의례를 차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힌두교식 의례에 참여한 불교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힌두화 돼 갔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의례가 힌두화되자, 불교는 점차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에서 각종 신들마저 차용해 왔다. 그러다 결국 불교는 힌두교에 용해되고 말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이다.
반면 자이나교는 달랐다. 자이나교도 힌두교의 신들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여주었다.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인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고, 12종의 통과의례도 갖고 있었다. 자이나교도들은 힌두세계 속에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이나교는 지금도 인도에서 나름의 교세를 유지하며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힌두교에 용해된 불교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정체성 잃고 힌두교 속으로 용해
사진설명: 부서진 산치대탑 주변의 승원.
‘불교의 힌두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불교는 인도에서 쇠퇴했다. 전쟁이나 급격한 혁명적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방식으로 힌두에 용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독립인도의 초대수상 네루는 자신의 저서〈인도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난폭한 수단에 의해 근절되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힌두교도의 지배층과 민중 층에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 교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때때로 지방에서 충돌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정치적 원인에서 야기됐고, 본질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아무리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불교에 의해 힌두교가 밀려나간 사실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힌두교는 여전히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불교는 자연사(自然死)했다.”
이만큼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을 정확히 꿰뚫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살(自殺)도 아니고, 타살(他殺)도 아닌 자연사가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이었다. 병에 걸려 오래 동안 앓다가 자연히 죽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노쇠하여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자연사. 인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흥했던 인도불교는 결국 정체성을 상실한 채 힌두사회에 용해(溶解)돼 자연사하고 말았다. 자신의 땅에서 버림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한 집단이든 한 종교든 한 사람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배들에게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한국불교는 자연사한 인도불교로 부터 분명하게 배워야 될 것이다.
인도·파키스탄·네팔·아프가니스탄=조병활 기자 bhcho@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자들 **
암베드카 개종에 중흥불길
다르마팔라는 순교 헌신
사진설명: 2002년 4월14일 인도 델리에서 거행된 암베드카 박사 탄신 111주년 기념행사 모습.
현대에 들어와 인도불교는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암베드카’(1891~1956) 박사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다. 불가촉천민 집안에서 태어난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 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로 개종했다. 1947~1951년엔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였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불교로 개종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길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암베드카는 1956년 10월15일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3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개종식을 갖고 ‘신불교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 인도에서 불교인구는 점차 증대하기 시작했다.
암베드가 박사와 함께 현대 인도불교 부흥(復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다르마팔라는 현대 인도불교 탄생을 위해 순교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도불교 재탄생을 위해 대보리회(Maha Bodhi Society)를 결성했으며, 부처님 관련 성지 유적을 보호하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는 운동도 주도했다. 특히 붓다가야에 있는 대보리사를 힌두교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결국 대보리사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바라나시의 브라만 가정에 태어나 새 몸으로 다시 대보리사를 위한 투쟁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죽을 만큼,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였다. 2003-05-03 오후 9:03:58 수정
네이버 까페 <불교수련>
50.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 민중과 단절된 불교…승원에 갇혀 ‘몰락’ <아잔타 석굴> 사진설명: 아잔타 석굴 같은 훌륭한 석굴은 있어도, 그런 석굴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현재 인도불교의 모습이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랐던 부처님의 땅 인도.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퇴하게 됐을까. 기원전 5세기 탄생돼 1천년 동안 사상적·문화적·종교적으로 인도대륙을 쥐락펴락 했던 인도불교. 인도불교를 발전시키고, 쇠미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동인도에 있던 밀교의 본거지 비크라마쉴라사(寺)가 1203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면서 역사적으로 인도불교는 최후를 맞는데, 한때 ‘불교’ 인도라고 불려지던 인도의 불교가 13세기 이후 무엇 때문에 인도의 ‘한미한 불교’로 전락해 버렸을까. 지난해 3월5일 인도 뭄바이에 도착, 칸헤리 석굴에서 취재를 시작하며 가졌던, 아니 출발하기 전부터 줄곧 품어왔던 “인도불교는 왜 쇠퇴했는가”하는 의문은 엘로라·아잔타·산치 유적을 보는 동안 더욱 커졌다. 아잔타 같은 세계적 유산을 남긴 인도불교가 사라졌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천여 년 동안 망각 속에 있던 아잔타 동굴은 햇빛을 보았는데, 아잔타를 만든 불교는 인도에서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단 말인가.” 한탄만 나왔다.
바이샬리·쿠시나가라·붓다가야·파트나·쉬라바스티·룸비니 등을 취재하는 동안에도 ‘그 원인’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인도의 ‘나란다 유적’과 파키스탄의 ‘탁실라·페샤와르 유적’을 답사하는 동안에 이유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카필라바스투 궁성 유적으로 간주되는 네팔의 틸라우라코트 유적에서 진행된, 힌두교도들의 의식을 참관하는 사이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든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이슬람의 동점’이 불교쇠퇴의 주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같은 ‘이슬람의 칼’ 속에서 힌두교는 존속하고 불교만 사라졌다는 것은 무언지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가자 응집할 독자적 의례없어
인도대륙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과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대략 이렇다. 인도불교 쇠퇴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불교의 학문화”다. 5세기 전반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나란다대학이 창건됐다. 7세기 당나라 현장스님이 도착했을 당시 나란다는 이미 예불당, 승원, 탑 등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일반사회와 유리된 대 사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불교가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나란다에서의 토론과 공부를 통해 ‘불교는 학문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8세기 9세기 10세기를 거치며 불교는 점차 거대한 승원 안에서,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비호를 주로 받으며, 일반과 유리돼 갔다. “학문연구를 핵으로 하는 이러한 불교는,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의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존재의 실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일본 나라 야스아키 교수).” 승원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자기들끼리의 지적 유희에 빠져있는 사이 대중들은 불교에 등 돌리고 힌두교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다대학과 비크라마쉴라사 등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사원에 있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인도불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대중적 지지가 없는, 대중의 생활에 지침이나 도움을 주는데 인색했던 ‘학문적 불교’의 예정된 말로였다고나 할까.
물론 ‘불교의 학문화’만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보다 직접적인 것은 재가조직의 결여, 포교에 대한 열망이 수그러든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불교가 출세간의 종교로 사회와 단절된 교단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출가조직을 도울 재가조직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불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 있었다. 그런데 불교만 사라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인도 보팔 부근의 파우니 스투파 터> 사진설명: 불교 스투파가 있었던 곳에 힌두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는 나란다나 비크라마쉴라사 같은 거대한 승원을 갖고 있었으며, 돌이나 벽돌로 건조된 승원들은 견고한 장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스님들은 모두 누런 가사를 입는 등 보통 사람의 복장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이 정연하게 걸식하는 모습은 군대를 연상케 함으로써 침입자인 이슬람교도들의 적개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민중의 종교로, 일반인의 사회생활 속에 완전히 용해돼 있었다. 신상(神像)을 모시는 사원도 규모가 작고, 소위 ‘교단조직’이란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힌두교를 멸망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셈이 된다. ‘이슬람의 칼’도 힌두교를 멸망시킬 수는 없었으며, 불교를 멸망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힌두교를 도운 셈이 됐다.”
인도불교의 쇠퇴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중 하나가 ‘불교의 힌두화’다. 불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불타의 세계〉 등에 의하면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 ‘힌두세계 속에 제대로 정착한 불교도’ 집단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교가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 밖에 독자적 집단으로 존재하지도 못했다. 불교도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응집시킬 ‘독자적인 생활규칙이나 통과의례’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의례다. 출가자들은 승원 안에서 자기들의 규칙에 의거해 수행하면 되지만, 재가자들은 의례에 의해 불교 신도가 되고, 의례에 참여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불교에 대한 신심도 깊어간다.
그런데 불교는 굽타시대(기원후 320~500) 이전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독자적인 의례가 없었다. 힌두교 의례를 차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힌두교식 의례에 참여한 불교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힌두화 돼 갔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의례가 힌두화되자, 불교는 점차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에서 각종 신들마저 차용해 왔다. 그러다 결국 불교는 힌두교에 용해되고 말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이다.
반면 자이나교는 달랐다. 자이나교도 힌두교의 신들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여주었다.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인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고, 12종의 통과의례도 갖고 있었다. 자이나교도들은 힌두세계 속에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이나교는 지금도 인도에서 나름의 교세를 유지하며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힌두교에 용해된 불교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정체성 잃고 힌두교 속으로 용해
사진설명: 부서진 산치대탑 주변의 승원.
‘불교의 힌두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불교는 인도에서 쇠퇴했다. 전쟁이나 급격한 혁명적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방식으로 힌두에 용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독립인도의 초대수상 네루는 자신의 저서〈인도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난폭한 수단에 의해 근절되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힌두교도의 지배층과 민중 층에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 교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때때로 지방에서 충돌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정치적 원인에서 야기됐고, 본질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아무리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불교에 의해 힌두교가 밀려나간 사실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힌두교는 여전히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불교는 자연사(自然死)했다.”
이만큼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을 정확히 꿰뚫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살(自殺)도 아니고, 타살(他殺)도 아닌 자연사가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이었다. 병에 걸려 오래 동안 앓다가 자연히 죽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노쇠하여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자연사. 인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흥했던 인도불교는 결국 정체성을 상실한 채 힌두사회에 용해(溶解)돼 자연사하고 말았다. 자신의 땅에서 버림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한 집단이든 한 종교든 한 사람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배들에게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한국불교는 자연사한 인도불교로 부터 분명하게 배워야 될 것이다.
인도·파키스탄·네팔·아프가니스탄=조병활 기자 bhcho@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자들 **
암베드카 개종에 중흥불길
다르마팔라는 순교 헌신
사진설명: 2002년 4월14일 인도 델리에서 거행된 암베드카 박사 탄신 111주년 기념행사 모습.
현대에 들어와 인도불교는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암베드카’(1891~1956) 박사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다. 불가촉천민 집안에서 태어난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 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로 개종했다. 1947~1951년엔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였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불교로 개종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길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암베드카는 1956년 10월15일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3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개종식을 갖고 ‘신불교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 인도에서 불교인구는 점차 증대하기 시작했다.
암베드가 박사와 함께 현대 인도불교 부흥(復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다르마팔라는 현대 인도불교 탄생을 위해 순교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도불교 재탄생을 위해 대보리회(Maha Bodhi Society)를 결성했으며, 부처님 관련 성지 유적을 보호하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는 운동도 주도했다. 특히 붓다가야에 있는 대보리사를 힌두교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결국 대보리사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바라나시의 브라만 가정에 태어나 새 몸으로 다시 대보리사를 위한 투쟁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죽을 만큼,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였다. 2003-05-03 오후 9:03:58 수정
네이버 까페 <불교수련>
이은구 저/세창출판사/1995.8.5
불교는 이미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제자들이 제1차 불전 결집을 할 때부터 두 파로 나뉘었다는 설이 있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에 이르는 동안 잡다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불교 내의 분파과정은 불가피했다. 불교는 불타가 죽은 뒤 계율을 엄격히 존중하는 교조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게 내려왔다. 그러나 제2차 불전 결집 때부터 이러한 종래의 경향에 비판적인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파작용은 아쇼카 왕의 통제로 당대에는 크게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계율과 일신의 해탈을 주로 하는 보수적 입장이 고수되어 제3차 불전 결집은 이 상좌부 불교를 정통화하는 선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진보적인 불교도 측에서는 불교의 경전을 자유로이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형식과 계율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보아, 일신의 해탈보다는 중생 제도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곧 대승불교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카니쉬카 왕에 의한 제4차 불전결집 때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는 여러 문화와의 수용과 사회발전에 따라 불교의 폭넓은 포용성이 필요하였던 시대적 요구의 결과라고 생각된다.그러나 인도에서의 불교 세력은 쿠샨 왕조의 복고적 브라만 보호 정책은 힌두교 발전에 고무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브라마니즘에 반기를 들고 개혁적인 종교로 발전해 온 불교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불교가 인도에서 확고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교의 침입에 따른 그들의 불교말살을 하나의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적인 요인이라 하겠고, 내재적인 요인은 다음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불교는 무신론에 그 바탕을 두고 브라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제식만능주의를 배격하므로 만민평등주의를 제창한 일종의 브라마니즘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종교였다. 그러나 인도라는 토양에서 배태한 불교는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관념인 윤회와 업사상을 받아들였다. 이는 신분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이즘의 중심사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신분제도를 무시하면서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던 불교의 평등사상이 빛을 잃고 만다.말하자면 브라만의 윤회와 업사상을 인정한 불교는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했고, 브라만의 신분제도와 이를 정당화해온 사상이 불타의 평등사상을 압도해 버렸다. 현세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살면 내세에는 더 좋은 상태로 태어난다는 업 사상이 신분제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어, 인도인들은 불교의 혁명적인 평등사상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고 불평등한 계급 제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불교는 카스트의 무의미함을 설하고 실제로도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분제도를 타파하는 사회개혁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말하자면 불교는 종교운동에 그치고 말았으며, 사회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국왕, 고급관리, 상인, 지주 등의 상류 계층에서 성장하고 발전한 도시형 종교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불교는 신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배의 대상도 없는 독자적인 종교였으나 그러한 상태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불타의 생존 중에 이미 신도 가운데는 그를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불타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후세에 와서 이러한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대다수의 다른 종교가 그러하듯이 불교도 몇 개의 종파로 분열된다. 그 중에서도 신도수가 많은 대승불교는 불타를 특히 신격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완강하게 거부한 형이상학적인 사상도 가미하였다. 우주에 천국과 지옥을 마련하고 성자(聖者)를 앉히고 또 향과 촛불과 성수(聖水)로 예배도 올렸다. 이처럼 신을 무시했던 초기 불교가 대승 불교에 와서는 불타를 중생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인식되면서 불교는 힌두이즘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불타를 사실상 신격화시킨 대승불교는 힌두이즘과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곧 불교가 서민 대중 속으로 파고 들게 했으나, 인도 내에서 힌두이즘에 융해되어 주체성을 잃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토착화라기보다는 불교의 힌두교에의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불타 자신이 완전한 신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된 것도 불교가 힌두이즘의 신관을 채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불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브라마니즘에 반기를 든 개혁종교로 출발하였다. 불교가 포교를 함에 있어도 브라만 계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느 한 지역에서만 두루 쓰이는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팔리어(마가디어)를 사용한 것은 브라마니즘의 전통에서 탈피하겠다는 불교의 정신과 불교가 발생한 마가다 지방의 역사적 환경을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팔리어 성전에 밝혀진 초기 불교는 어디까지나 비브라마니즘의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내려와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테라바다 불교에서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전환함에 따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소위 범어(산스크리트어)경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불교 문화가 비브라만 주의를 그 본질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브라만 문화에 이끌려 들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대승불교의 진언(眞言, mantra)과 다라니(dharani)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이 가미되어 7세기경에 홍성한 밀교(密敎)는 불교의 변질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불교가 힌두교의 샥티즘(Saktism)과 탄트리즘(Tantrism)의 영향을 받아 그 자체의 종교적 본질을 잃은데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쉬바나 비슈누 신에 대항할 근거를 상실했다. 게다가 대승불교는 철학적 깊이를 더하여 대중으로부터 실질적인 감화력을 잃게 된다.7~8세기에 이르러 불교에 위협을 주는 시대가 시작된다. 북인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는데, 특히 타밀에서는 힌두교 박티(bhakti) 신앙의 흐름이 도도한 대하를 이루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변모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박티 신앙의 흐름을 이어받은 비슈누파와 시바파의 성자들이 출현했다. 불교 본래의 생경하고 참신한 종교성이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에 대한 정열적 사랑을 역설하는 박티 운동의 출현은 남인도 불교의 쇠퇴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굽타 시대의 불교는 힌두신과 힌두의 주술적 의례를 대폭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독자적인 것으로 변용되었다기 보다는 힌두적인 관념이나 의례를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힌두적인 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힌두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힌두 세계에서 더 이상 이단적인 종교로서의 근거를 상실하여 불타가 비슈누의 권화(화신)로 간주되고 말았다. 현재 힌두교도들은 불타를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고 믿고 있어 그들에게 있어 불타는 힌두이즘의 주신 비슈누 그 자체인 것이다.비슈누의 신자들이 기원후 4세기경부터 불타를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틀림없이 불교가 독자적인 운동으로서 확립되는 데에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불교자체에서 창조적인 지성의 활력이 쇠퇴했다는 점일 것이다.불교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는 자이나교도 힌두의 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 응집력은 매우 견고한 것이어서,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으로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다. 12종의 통과의례도 확립되어 있었다. 자이나교도는 힌두세계 속에 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서의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자이나교 집단이 힌두세계에 정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불교도는 힌두사회 안에서 정착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탄트릭(tantric) 밀교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불교 본래의 깨달음과 거기에 근거를 둔 윤리적 삶의 종교성은 힌두교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불교의 독자적인 사상이 철학으로써 연구되거나 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불교도의 실천적 생활에는 그다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도로서의 연대감이나 교단 전체로서의 생활에 대한 강제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응집력 있는 집단으로 만들만한 요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의 침입이 북인도 불교의 쇠퇴를 채찍질하고 문화적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불교쇠퇴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던 것이다.마지막으로 불교에 불어닥친 치명적인 강타는 12세기에 일어났다. 수세기 전부터 인도에 들어와 있던 회교가 1197년에 와서는 드디어 불교의 마지막 거점을 침략했던 것이다. 8세기 이후에 터키계 이슬람 교도가 북서 인도에 진출하게 되는데, 11세기의 가즈니 왕조와 고르왕조 등도 북부 인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상을 혐오하여 아프가니스탄, 간다라, 카쉬미르 등지에서 불상의 얼굴을 깎아버리거나, 목을 치거나, 또는 사원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하여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쳐 벵갈과 비하르의 불교 사원은 이슬람 군대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경전이 소각되고, 건물이 파괴되었다.이런 연유로 해서 북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 걸쳐서 불교는 그 이전부터 내적인 이유로 힌두세계에 접근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마침내 힌두 세계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상실해 갔던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후일에는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였지만, 원래 불교의 근본적인 세계관은 인도 고유의 사상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이와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통해 전개되어 불교는 인도의 사상과 문화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인도사상의 커다란 물줄기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그래서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인도의 사상이라는 토양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 따라서 힌두교도에게 있어서 불타의 가르침은 모두 힌두교 안에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불교는 힌두교라는 큰 세계안에 하나의 움직임이었으며, 불교는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힌두교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는 종교였다. 그리고 불타의 가르침이 망각된 것은 아니다. 불교의 가장 귀중한 가르침의 대부분은 인도 사상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대 인도의 불교는 힌두교라는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생활문화에 관심을 두는 한,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사회 및 생활양식이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는 힌두교 ‘세계’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는 다른 종교라기보다는 같은 힌두교 중의 다른 종파로 간주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학문의 융성과 불교의 쇠퇴 힌두적인 여러 요소들과의 융합 강도를 더해가면서 불교는 8세기 이후에도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나간다. 인도각지에서는 불상이나 승원의 건립과 개축에 대한 기부 명문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비구 상가와 재가 신자 사이의 호혜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유품도 상당수에 이른다. 8세기 중엽부터 12세기까지 지금의 비하로 지방과 벵갈 지방을 지배하던 팔라 왕조 시대에는 밀교계의 불상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날란다를 비롯한 대사원의 번창했던 상황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불교는 점차 쇠퇴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밀교 경전이 많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남아있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원전은 없어졌다 해도 티베트어 번역과 한역으로 남아있는 경전의 수효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대부분은 의궤나 행법, 사상서적에 한정되어 있다. 서부 데칸 지역의 불교 석굴 조성은 대략 9세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고, 제13굴~제19굴에 이르는 힌두교 석굴은 6세기 중엽 내지 말엽에서 9세기를 걸치는 기간 동안에 질과 양이 모두 뛰어난 조각을 남겼다. 제30~34굴은 자이나교 굴로서 9~10세기에 속한다. 그리하여 기원 전 1세기 이후, 천년 가까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불교도들이 보여주던 석굴 조성과 벽화, 조각 등에 나타난 활력은 점차로 쇠퇴되어 갔던 것이다. 다른 지방의 승원이나 사당의 축조도 이와 마찬가지로 쇠퇴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굽타 시대와 그 이후 4~7세기의 명문에 비해서 8세기의 이후의 불교 명문은 현저하게 그 수가 줄어들었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경우에도 미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면의 충실한 정신성이 결여된 것이 많다. 이러한 상황은 모두 불교의 쇠퇴를 암시해 주는 징후들인 것이다. 반면에 규모가 큰 불교 사원의 융성은 실로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6세기 전반에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하여 창건된 날란다 사원은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의 보호에 힘입어 점차적으로 확장된 결과, 7세기에 이르러 현장에 체류했을 무렵에는 많은 승원과 탑, 예불당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대사원’되어 있었다. S.닷트교수는 약 200개의 촌락이 사원에 기부되어 경제적인 기반의 구실을 해주고 있었던 점을 기술하고 있다. 현장과 의정 등, 중국 승려들의 기술이나 그 밖의 자료에 의하면, 여기서는 단순한 불교 철학 외에도 각종 베다의 연구에서부터 문법과 음운학, 천문학, 의학이나 바라문계 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날란다는 당시 학문의 일대 센터로서 입학 자격도 정해져 있었으며, 광범위한 연구 활동을 바탕으로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날란다 사원이 가지고 있는 학문 사원적 성격은 8세기 이후에 주로 팔라왕조에 의하여 건립된 사원 대학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8세기 중엽의 고팔라왕은 팔라 왕조의 창시자이며, 그의 왕가는 탄트릭 밀교의 신자였다. 고팔라왕은 날란다 대학에서 9km쯤 떨어진 지금의 비하르샤리흐 거리에 오단타푸리 사원을 창건했다. 한편 바가르푸르 시가가 이에 있다고 하는 비크라마실라 사원은 다르마팔라왕이 건립한 것으로 밀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아티샤(982~1,054)는 이곳에서 공부한 후에 티베트로 돌아가서 티베트 밀교를 개혁했다. 마히팔라 1세의 전성기였던 11세기에는 소마푸리 사원도 이미 벵갈 지역의 학문 센터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자갓다라 사원문 센터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자갓다라 사원도 11세기 중엽에 라마팔라왕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방글라데시 소재 치타공에 있었던 판티타 사원에도 많은 학승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불교에서 학문이 크게 번성했었다는 사실은 적잖은 학자들의 이름이나 논서로서도 알 수 있다.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샹카라를 비롯한 힌두계 사상가들과의 논쟁이 한창이었다는 사실도 불교의 학문적 발전이 힌두교의 학문 연구와 동일한 수준에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불교가 일반 서민들과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으며, 또 어느 정도 일상생활 속에 신선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던가 하는 문제는 확실치 않지만, 학문이 번성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불교는 이 시대에 이르러 학문화되었다거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S.닷트 교수는 힌두교도인 굽타의 역대 왕들이 날란다를 비롯한 불교의 대사원들을 보호한 가장 큰 이유의 하나로, 이러한 불교 사원이 불교뿐만 아니라 점차로 당시의 일반적인 학문 연구 센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점을 들고 있다. 규모의 사원 대학은 모두 왕가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 많은 학승들이 모여 있었다. 중국 승려들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티베트의 학승들도 많이 운집해 있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7세기 전반의 티베트에는 손첸 감포왕이 나타나 각 부족을 통합하여 지배권을 잡은 다음 인도로부터 불교를 도입했다. 또 인도 문자를 모방하여 티베트 문자도 만들었다. 왕은 인도로부터 유명한 학자를 초청하고, 또 인도로 유학승을 파견하는 등, 불교의 진흥에 진력한 결과, 인도 불교는 도도히 티베트로 유입되어 정착의 길을 닦아 나갔다. 대승논서나 밀교 경전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으며, 또 직접 티베트에서 저술된 것도 많았다. 이와 함께 원시 경전이나 초·중기의 대승 문헌도 소개되어, 티베트어 번역 문헌은 한역 문헌과 더불어 불교 연구의 일대 보고(寶庫)가 되었다. 비하르와 벵갈의 대규모 사원 대학은 이러한 티베트 불교와의 중요한 교류 무대였다. 동시에 당시 불교 센터였던 북서 인도와 캐시미르 지방도 인도 불교와 중국 및 티베트 불교와의 교류 거점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8세기 후반에 티베트의 치손 데첸왕은 날란다의 저명한 학승 샨티라쿠시타(寂護)를 초청하고, 북서 인도의 우디야나에서 파드마삼바바(연화생,蓮華生)도 초청한 바 있다. 후자는 주술에 능한 자로서 티베트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극복하고 티베트 불교의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중부 인도에서도 불교가 각가지 형태로 신봉되고 있었음은 몇몇 단편적인 자료들이 나타내고 있는 상황으로 미루어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마히팔라 1세 대인 1,026년에는 파괴되어 있던 사르나트의 사원이 복구되었고, 11세기 초엽에는 보드가야로부터 찾아 온 중국 승려들에 의하여 많은 불탑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번영했던 불교는 필시 밀교 계통의 불교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면에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불교권에서도 보드가야를 비롯한 순례지를 위주로 하여 인도 불교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세나 왕조의 자야제나왕은 13세기에 보드가야의 금강보좌에 한 촌락을 기부하고, 삼장에 통탈한 스리랑카의 승려 망가라스바민을 그곳에 데려 왔다. 그들은 밀교를 몹시 싫어했다고 하는데, 마침 인도를 순례하고 여행기를 남긴 티베트의 승려 추 제페(다르마스바민)을 만나 반야경을 버리라고 강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나 현세 이익적인 차원에서나 다소나마 주술성을 띤 의례가 흔히 쓰이고 있어서, 유신론적인 경향이 짙었던 대승불교와 원시 부파불교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남방 상좌부와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따금씩 충분한 만큼의 상호 이해를 결하고 있는 수가 있다. 후자는 대승불교를 가리켜 선정, 염불, 가지(加持), 기타로 대표되는 깨달음의 차원을 전승하지 않은 주술적 복합체라고 비난하며, 심지어는 불교가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한편 대승불교 측에서는 남방 상좌부를 가리켜 계율에만 맹종하는 형식화된 불교라 하여 이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모두 스스로가 전승한 고차원의 출세간적 차원에 입각해서 상대편의 세속화된 부분만을 지적한 발언이다. 망가라스마민과 다르마스바민과의 대결은 남전과 북전의 대립이 이미 13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학문 연구를 핵심으로 한 불교의 전통은 그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이미 그 존재의 실체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대략 12~13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교도의 불교 박해는 드디어 인도 불교의 종말을 분명한 형태로 매듭짓고 말았던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나?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인도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 불교의 발상지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발상지인 인도에 가보면 인도 불교의 위치는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 모든 불교 유적지는 외국인들의 발길만 이어 질뿐, 인도 불자들의 방문은 거의 없다. 물론 인도에서는 초라하고 볼품없으나,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 불교는 국교로서 혹은 토착신앙으로 많은 신자와 포교활동으로 큰 위세를 떨치고 있기는 하다. 모든 종교나 스포츠에 있어서 최초 발상지는 큰 영향력이나 위세를 가지고 있다. 축구의 발상지(영국), 야구(미국), 유도(일본), 태권도(한국)등 뿐만 아니라, 유교, 이슬람등의 발상지를 보면 영향력이나 위세를 알 수 있다.인도에서의 불교의 위치를 살펴 보면, 83%의 힌두교, 12%의 이슬람교, 2.5%의 기독교, 2%의 시크교에도 못 미치는 제5위 0.7%(6백만명)에 불과하다. 인도 외부에서의 위치와 영향력에 비하며 한없이 초라한 실적이다. 왜 인도에 있어서 번영을 구가하던 불교의 위치가 송두리채 사라져 버렸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불교의 탄생: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인 석가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 네팔 지방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 29세가 되던 해에 출가를 한다. 당시 인도에는 토착 민속 신앙인 바라문교가 있었고, 바라문교에 뿌리를 두는 불교를 비롯하여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등이 파생하게 된다. 석가는 그후 6년간의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인 수행에 전념하며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해탈에 이르게 된다.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의 종교, 석가모니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종교이다. 그러나 초기의 원시불교는 개인의 수행을 중심으로 부처가 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후에 수행방법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뉘게 된다.불교의 흥망성쇠:
원시 불교는 초기 일반 대중으로부터 선풍적 인기를 얻으면서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기원전 317년 찬드라굽타에 의하여 세워진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Mauria) 제국의 후원에 힘입어 불교는 아쇼카 왕 시대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4세기초에 힌두적 색채가 강한 굽타 왕조의 등장으로 불교도가 급속하게 줄어 들고, 곧이어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고, 1203년 비크라마실라 대사원이 이슬람 군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고, 교단의 쇠퇴와 함께 1600년의 전통을 지닌 인도 불교는 막을 내린다.인도 불교가 쇠퇴한 이유:1) 힌두교와 차별성을 부각하지 못함:
바라문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힌두교와 불교는 상당히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에 초기 대중으로부터 거부감없이 불교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수행방법, 내세관, 신의 형상등의 힌두교와의 유사점이 많은 것이 초기 전파에 유리하였으나, 결정적으로 불교가 힌두교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부각시키지 못한채 신자들을 힌두교로 회귀하게 되는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2) 수행방법이나 참선 등 힌두교의 아류로 취급됨:
불교 용어인 윤회나, 업, 해탈등은 사실 힌두교의 개념이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 업, 해탈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사상은 석가모니에 의하여 체계화되었지만, 결국 힌두교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중들의 인식을 벗어 나지 못 하게 된다.3) 반 카스트제도의 도입 실패:
초기 불교는 카스트 제도를 반대하는 등 대중으로부터 선풍적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사회 대중에 대한 설교보다는 개인의 수행방법을 더 중시하던 당시 교단으로서는 사회적 문제인 카스트제도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 한다.
따라서 참신하고 혁명적이고 현실적인 삶에 무게를 두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바라던 대중으로서는 불교의 이중성에 등을 돌리게 된다.4) 이슬람교의 흥기:
불교의 초기 전파는 갠지스강변을 중심으로 주로 인도 북부 지역을 근간으로 이루어 지게 된다. 그러나 불교의 주무대이던 이 지역은 4세기 이후 이슬람을 등에 업은 굽타 왕조, 무굴제국등의 등장으로 근거지 자체를 잃게 되면서 불교가 쇠퇴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5) 국교로써의 채택:
마우리아 왕조이후에 인도에서 불교를 신봉하는 왕조가 생겨 나지 않음으로써, 결정적으로 인도 불교가 쇠퇴하는 큰 요인이 된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불교가 크게 흥성한 이웃 나라인 미얀마, 캄보디나, 태국, 스리랑카, 티베트 등의 예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 난다.이상과 같은 요인이 인도에서 불교를 쇠퇴하게 만들고 초라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사후, 초기 불교의 대중적 인기에 너무 안주한 나머지 대중에게 다가 가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제일 큰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중의 입장에서 신흥 종교를 전파하고 설교하는 방법등도 제도적으로 상당히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지금 잘 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한번 더 박차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7. 인도불교의 쇠퇴와 현재
불교의 힌두화
굽타시대 이후의 불교가 보여주는 현저한 특징으로는 불교문화 속에 스며든 많은 힌두적 요소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힌두교 속에 투영된 불교의 영향도 찾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힌두교
속에 투영된 불교의 영향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불교는 한편으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힌두 사회 속에 안정된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불교에는 예배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멸 후 불타는 점차 법륜. 보리수. 족적(足跡) 등을 통해 상징적인 형태로 숭배를 받았고, 불탑과 불상이 출현하자 불타는 숭배의 대상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어서 대승불교 시대에는 여러 불타와 보살 관념이 정착되어 유신론적 신앙형태로 성립되어 갔습니다.
굽타왕조 이후에는 당시의 힌두교도가 신봉하던 여러 신들이 대량으로 불교에 유입되어 불교문화 속에 갖가지 기능을 갖고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신론적 경향에 따라 힌두 사회에서 사용되던 여러 가지 주술적 요소, 주문 등이 불교화 됩니다. 다라니와 만트라도 그 한 예이며 밀교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불교가 항상 반대하던 카스트제도에 대해서도 점차 비판하지 않게 되며, '불타는 고귀한 가문에서 나온다'고 한 경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교가 힌두화 됨으로써 불교는 힌두사회 내부에 안정된 지위를 구축하게 됩니다. 불타가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받들어지거나, 불타 공양일이 인도 사회에 정착되어 마치 불교가 힌두교의 한 종파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밀교
불타는 주술을 비롯한 브라만의 종교의례를 부정하였으니, 이것은 초기 교단의 기본적 성격의 하나였습니다. 불교의 주된 지지자 층이 도시를 중심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종래와 같은 주술적인 농촌 사회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농촌 사회에로 침투해 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힌두이즘의 형성 과정에서 브라만의 종교의례에 토착신앙이 포섭되었다는 것은 대승불교에도 상당한 자극을 주어 불교 경전에도 의례적, 주술적 신비주의적 색체가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475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대서방 무역이 쇠퇴하여 불교를 지탱해 온 상업사회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농촌사회에 기반을 가진 힌두이즘이 크게 발전. 부각되며,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도 신비적 의례적 색채를 한층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밀교입니다.
밀교의 정의는 여러 각도에서 논의될 수 있으나 일단 '대승불교 사상이 예배. 의례, 만트라, 만달라 등의 형태로 구상화되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행법(行法)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교에서는 우주의 진실(法)을 대일(大日) 여래로 파악하며 그 몸(身), 말(口), 마음(意) 으로 표현되는 진실(三密)을 수행자의 몸. 말. 마음에 일치시켜 성불을 꾀합니다. 이를 위해 만트라와 만달라를 이용하여 의식을 집중시켜 진실을 명상함으로써 불타와의 합일을 도모합니다.
밀교의 발전 단계는
1) 세간 차원의 주술적 관념과 의례가 전통화되어 가지만 아직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행법으로 승화되지 못한 4-7세기의 밀교이전 단계를 '잡부밀교(잡밀)'라 합니다.
2) 주술적 관념과 의례가 승화되어 깨달음과 직결되며, [대일경], [금강정경] 등의 대표적 경전이 저술되는 7-8세기 후반의 밀교를 '순수밀교(순밀)'라 합니다.
3) 8세기 후반부터는 탄트라 밀교가 성립합니다. 이것은 요가행법을 통해 신비적 체험을 얻어서 절대자와 합일하려는 힌두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수행 과정에 남녀의 성교가 행해지기도 합니다. 탄트라 밀교는 기본적으로 힌두 탄드리즘과 동일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인도 불교 발전의 최후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본질인 열반이나 출세간적 차원의 의례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힌두 탄트리즘과 동질화 되었을 때 불교는 불교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힌두세계로 흡수되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쇠퇴
힌두적인 여러 요소들과의 융합 강도를 더해가면서 불교는 8세기 이후에도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각지의 불상이나 승원의 건립과 개축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경전 제작은 주로 밀교경전으로 그 대부분은 의궤나 행법, 사상 서적에 한정되며, 서부테칸 지역의 불교석굴 조성은 대략 9세기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불상. 보살상의 경우에도 내면의 충실한 정신성이 결여된 것이 많습니다.
반면에 규모가 큰 불교 사원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5세기 전반 창건된 나란다 사원은 점차 확장되었으며, 여기서는 단순한 뷸교철학 외에도 광법위한 학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사원이 건립되어 학문이 크게 번성했었습니다.
대규모의 사원대학은 모두 왕가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 많은 학승이 모여 있었습니다. 당시의 불교가 일반 서민과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상 생활 속에 어느 정도 진정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던가는 의문입니다.
8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북서인도에 진출하였는데, 11세기에는 다시 몇 왕조가 북부인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칸, 간다라, 캐시미르 등지에서 불상의 얼굴을 깍거나 목을 치거나 사원을 파괴했습니다. 그리하여 12세기 말엽 - 13세기에 걸쳐 불교사원은 이슬람 군대의 침공으로 파괴, 소각되고 승려는 살해 또는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고대 인도의 불교는 급속히 그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이슬람의 침입이 북인도 불교의 쇠퇴를 채찍질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이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불교는 탄트라밀교 이후 독자성을 상실하였으며 불교도로서의 연대감이나 교단 전체로서의 생활에 대한 강제력이 없어 응집된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힌두세계에 정착, 생존하지 못하게 됩니다.
북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 불교는 내적인 이유로 힌두세계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마침내는 힌두세계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상실해 갔던 것입니다. 이슬람의 침략을 받지 않은 남인도와 기타 각지의 불교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힘을 잃고 소멸되어 갔습니다.
현재
현재 힌두의 신앙 속에는 불교적 사상이나 실천의 영향과 자취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와 아샘 그리고 버마의 아라칸 지방에는 현재까지도 밀교계통의 집단이 존속한다고 합니다.
1951년 조사에 의하면 인도 총인구의 0.5%인 약 18만명이 불교도였습니다. 그 뒤 1956년 이래로 B.R. 암베드카 박사의 주도하에 불가촉천민 계층인 마하르족이 집단개종을 행하여 350만명의 신불교도(Neo-Buddhist)가 탄생하였습니다. 개종한 그들은 힌두교의례 대신 불타를 예배하고 불교 의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인도에 있어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대 불교는 왕족과 부호 등 사회 특수 계층의 종교였습니다. 생산계급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천시되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착취당하고 있었고, 한편 비생산계급들은 생산계급에 기생하면서 사회적 특권과 물질적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인평등과 고통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외치며 출발했던 불교는 여러 번에 걸쳐 자기 변혁을 시도하지만 끝내 인도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상류층의 종교로서 민중의 고통 위에 풍요로운 생활을 엮어왔던 것입니다. 인도의 찬란한 불교문화의 그늘에는 수많은 민중들의 고통과 한숨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도불교의 침체와 중국불교
1. 인도불교의 침체와 수난
인도불교의 쇠퇴하게된 것은 이슬람교가 침입해서 불교의 사원과 유적을 파괴한 행위 때문이다. 밖으로는 이교도들의 파괴적인 침범 행위와 안으로는 인도 바라문교의 타종교 흡수 수용하면서 불교는 바라문교와 점점 동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리하여 인도불교는 안으로는 바라문교와 동화되고 밖으로는 이교도들의 강한 침입을 맞이하면서 일대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슬람교가 인도에 침범한 이후로는 불교가 인도에서 서서히 떠나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걸쳐서 세계종교로 성장하면서 또 다른 불교의 면모를 보이게 된 것이다.
2. 중국불교의 13종
불교는 인도를 떠난 후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전통을 세웠다. 그 예를 하나 든다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는 종파중심의 불교로 나타나기 시작 했다. 부파와 종파의 차이점은 부파는 불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특수한 집단이라면 종파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불교단체라 할 수 있다. 종파에서도 경전을 연구하고 이념을 세워 그에 알맞은 생활양식을 수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부파에서 보다는 중심인물(종주)의 영향력이 더 크게 나타난다.
어떤 특수한 인물이 어느 이념을 가지고 불교의 전통을 수립할 때 그 인물 중심으로 종도(宗徒)들이 추종해서 새로운 규범을 조성하며 그 전통을 계속 계승해 나가는 것이 종파불교의 특징이다. 이러한 종파가 중국에서 많이 발달 했는데 그대표적인 종파를 보통 중국불교의 13종(宗)이라 한다.
그 13종은 (1)구사종(俱舍宗) (2)성실종(成實宗) (3)삼론종(三論宗) (4)섭론종(攝論宗) (5)열반종(涅槃宗) (6)천태종(天台宗) (7)법상종(法相宗) (8)지론종(地論宗) (9)진언종(眞言宗) (10)정토종(淨土宗) (11)계율종(戒律宗) (12)화엄종(華嚴宗) (13)선종(禪宗)이다.
이런 13종의 성격을 간략히 살펴보면 첫째 구사종은 소승불교의 논서를 체계 있게 연구하는 종파이다. 그 다음 성실종, 삼론종, 섭론종, 지론종은 다 대승불교의 논서를 연구하는 종파이다. 그 다음 열반종은 대승경전 중 열반경을 중심 교리로 하여 세워졌으며 화엄종은 화엄경을 중심경전으로 성립되었다. 법상종은 불교를 인식론적인 학문으로 체계화한 종파이며 계율종은 불교에 있어서 계율 면을 크게 강조한 종파이고 진언종은 비밀불교 의식을 계승한 종파이다. 정토종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염원하며 아미타불을 신앙하는 종파이고 선종은 참선수련을 근본으로 하는 종파이다. 이중에서도 천태종, 진언종, 정토종, 화엄종, 선종은 많은 영향력을 나타낸다. 이들 종파를 한국불교와 관련지어서 몇 가지만 고찰해 보겠다. 이점에 있어서 제일먼저 언급 할 수 있는 것은 화엄종이다. 화엄종에서 기본경전으로 하고 있는 화엄경은 매우방대하고 체계도 우람하여 불교의 총서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화엄경은 중국에서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선양하였다. 중국의 많은 스님들께서 화엄정신을 체계화하고 보급하는 일에 몸 바쳐 왔다. 이리하여 중국의 화엄종은 아주 풍부하게 발달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의상(625-702)대사께서도 중국에 가서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신바 있다. 의상스님은 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600-668)대사로 부터 화엄의 학문과 체험에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의 위치에 해당하는 스님이시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중국에 계속 계시지 않고 신라에 돌아왔기 때문에 중국 화엄종 전통은 의상스님으로 되어있지 않으나 사실상 중국 화엄중은 우리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바 있다. 그리고 선종에 대해서 약술해 보면 중국불교에 있어서 선종, 즉 선불교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불교의 특징인 동시에 동북아시아 불교의 특성이라고 할 만큼 애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 불교의 선중은 발달 과정에서부터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큰 의미를 간직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중국불교의 13종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중국불교의 13종 종파도 인도불교에 있어서 부파 불교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별로 세력을 떨치지 못하는 종파가 있었는가 하면 끝까지 종파불교의 특징을 전체 불교로 보급하는 종파도 있었다. 예를 들면 13종중에 선종, 화엄종, 천태종, 정토종 등과 같은 종파는 전 중국 불교계를 대표할 정도로 두루 보급된 종파이다. 이들 종파들은 서로서로 고리와 사상을 받아들여 혼용해 왔었다. 이러한 13종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발달한 불교는 우리나라에 거의 다 그대로 들어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 가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종파가 형성되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인도, 중국, 한국, 일본불교의 전체적인 역사 과정에 나타난 개요라 할 수 있으며 오늘에 와서는 이러한 불교를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소승불교, 둘째 대승불교, 셋째 비밀불교, 넷째 선불교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민중과 멀어지고 차별성 없어 힌두교에 ‘흡수’
인도불교란 일반적으로 부처님 이후 이슬람교의 침입 이전까지 인도에 존재했던 불교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은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의 승가교단이 소멸하여 이미 종교로서의 독립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도에서 불교가 쇠멸한 원인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슬람교도의 침입에서 원인을 찾는다. 물론 그것은 인도불교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외적 요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불교와 같은 처지였던 힌두교나 자이나교가 지금도 살아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서만 17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인도불교가 쇠멸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인도불교 안에는 자기 붕괴를 초래할 다양한 내적 요인을 이미 간직하고 있었지 않을까. 그래서 인도불교가 쇠멸하게 되는 내적 원인들을 찾는 데에 주력하고자 한다.
<사진설명> 대중과 견리된 불교는 점차 인도에서 자취를 잃어갔다. 사진은 산치대탑 주변 승원이 부서진채로 전해오는 모습
부처님은 주력(呪力, mantra)을 배척했다. 주력은 악마를 퇴치하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본질은 악마를 퇴치할 수 있는 신에 대한 기도와 찬송에 있기 때문에 불교는 악마와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도불교는 초창기부터 왕족 계급과 자산가인 상인 계급(長者)들의 후원과 보호 아래서 성장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멸의 양날의 칼로 작용하여 불교쇠퇴를 가져오는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게 된다. 왕족 계급과 새로이 등장한 상인 계급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여전히 베다 이래 주력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에 더욱 강렬해졌다. 불교의 후원세력이던 왕족의 세력이 확대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불교 승려들이 불교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주력과 각종 의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불교의 성격을 부처님 당시의 무신(無神) 사상에서 유신(有神) 사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였겠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지키고 불탑을 세운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한 대승사상은 마침내 우상으로 불상을 숭배하는 사상과 관습을 낳게 된다. 이것은 2세기 초에 일어난 간다라 미술의 불상 제작으로 더욱 조장되었다. 이러한 불상의 제작을 배경으로 우상 숭배에 따르는 유신 사상이 주력을 중시하고 각종 의례를 배태시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력 전 3세기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 왕, 서력 전후의 꾸샤나 왕조의 까니쉬까 왕 때 인도불교는 나름대로 꽃을 피웠다. 아쇼까 왕은 전국 각지에 불교를 전파하고 탑을 세웠다. 그런데 이렇게 전파된 불교는 이미 민중 사이에 깊이 침투해 있던 주력과 각종 의례와 습합함으로써 도리어 불교 자체가 브라흐만화(brahmanization)로 촉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꾸샤나 왕조 때 불교를 지탱해 온 주된 기반은 서방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사용한 화폐에 부처님의 이름이나 불상이 들어 있는 것은 거의 없고, 그리스와 로마, 이란 그리고 힌두교의 신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당시 불교가 ‘부처님’ 중심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슬람교도 침탈이 승가교단 소멸 결정적 요인
굽타왕조 힌두교를 국교로…사회 기반 더 약화
이러한 사실들이 인도불교가 쇠멸하는 원인(遠因)이라면, 좀 더 근인(近因)은 굽타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력 후 320년에 건국한 인도의 굽타 왕조는 서방의 서로마제국과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상인 계급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이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굽타 왕조는 힌두교를 국교로 하여 브라흐만 문화를 부흥시킨 왕조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힌두 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힌두교의 성장이 불교의 사회적인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불교교단에서는 중관, 유식학파와 불교논리학파 등의 학문적 성과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인도의 중심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불교의 후원 세력이던 상인계급의 몰락과 함께 국가재정의 빈곤을 가져 왔다. 다른 한편으로 농촌에 기반을 둔 브라흐만 세력이 부활하게 된다. 이는 주력에 바탕을 둔 브라흐만 사상, 즉 힌두교 사상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힌두교는 샥띠(akti, 性力) 숭배가 활발해져서 쉬바 신을 숭배하는 쉬바파(aiva)에 속하는 힌두 딴뜨리즘(tantrism)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흔적은 인도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 일컫는 아잔따, 엘로라, 카주라호 등에 새겨진 무수한 성교상(性交像, maithuna)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미술이 그리스적 사고에 기반한 간다라 양식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인도적인 사고에 의한 굽타 양식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불교의 힌두화를 촉진시킨다. 굽타양식의 불상에는 여러 가지 무드라(mudra-, 印契)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밀교 사상에 따라 주력을 주장하는 우상숭배가 은밀하게 승원의 깊은 곳에서 행해졌다는 증거이다.
굽타 시대 힌두교의 지배적 위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아 인도불교의 교단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대승을 따르던 재가자들도 인도 일반의 민간신앙과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다라니(dha-ran.1-), 무드라(mudra-), 만다라(man.d.ala) 등을 신앙방식으로 채용하여 여러 의식을 통해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불교의 다른 발전 양상인 밀교의 성립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주력을 중심으로 한 다라니 경전이 제작되게 된다.
지배층 후원은 ‘대중지지 상실’ 부메랑 작용도
출가자 중심-교의 전문화 등 민중 생활과 괴리
힌두 딴뜨리즘의 의례와 교의 내용을 많은 부분에서 채용한 밀교의 교의는 불교 고유의 특징을 상실하게 됐고, 동시에 불교가 힌두교에 동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밀교가 성립되는 계기를 단순히 힌두교와의 습합에서만 찾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기 시작했던 다라니 등의 주력은 밀교의 뿌리로서 인정되며, 더 나아가 인도사상의 일반적 토양에서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밀교의 성립은 인도불교의 쇠멸을 앞당기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사적 실체가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부파시대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성립된 다불(多佛) 사상, 삼신불설(三身佛說) 등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역사적인 인물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불보살들이 등장함으로써 힌두교의 신격들에게 접근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급기야 석가모니 부처님이 힌두교의 만신전 속으로 편입되어, 현재 인도에서 부처님은 힌두교의 한 신격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출가의식을 거친 승려들도 다시 재가자와 같은 위치로 돌아갈 만큼 교단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이는 교단의 지적 활동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로, 밀교교단에서 출가비구는 주술사 내지 마법사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힌두교의 쉬바교(aivism) 또는 비슈누교(vais.n.avism)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한편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이전에 조성된 석굴사원의 많은 조각품에서도 불교가 힌두세계로 흡수되어 가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잔따의 석굴사원에 있는 보살상처럼 7세기 이후의 많은 보살상들에게 브라흐만의 권위를 부여하려 했다. 또한 이 시대의 대승불전은 ‘부처님은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다’라고 단언하며, 계급제도를 당연한 것으로서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론적으로는 대승을 표방했음에도 보살수행보다는 불법(佛法)에 대한 논의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재가자 중심에서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전환되고, 또한 교의가 전문화됨으로써 사실상 민중의 생활과 괴리되고 말았다. 실천적으로는 유신론적 경향의 타력신앙을 강조했던 대승의 입장이 갈수록 세속화되어, 마침내 힌두교의 사회체제 속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고, 쇠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마지막 보루였던 승원들이 11~13세기에 걸쳐 침입해온 이슬람교도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들이 학살됨으로써 불교는 더 이상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추기에 이른다.
불교가 쇠멸하는 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이슬람교도의 잔혹한 침탈이지만, 그 이전에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어, 이미 불교가 힌두교 속으로 매몰되어 버렸던 것이 인도불교를 쇠멸케 한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도의 근현대 사상가인 라다끄리쉬난(1888~1975년)의
“인도에서 불교가 쇠멸하게 되는 근본원인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비슈누교, 쉬바교, 딴뜨라 신앙 등과 같은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불교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라고 한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50.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 민중과 단절된 불교…승원에 갇혀 ‘몰락’ <아잔타 석굴> 사진설명: 아잔타 석굴 같은 훌륭한 석굴은 있어도, 그런 석굴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현재 인도불교의 모습이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랐던 부처님의 땅 인도.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퇴하게 됐을까. 기원전 5세기 탄생돼 1천년 동안 사상적·문화적·종교적으로 인도대륙을 쥐락펴락 했던 인도불교. 인도불교를 발전시키고, 쇠미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동인도에 있던 밀교의 본거지 비크라마쉴라사(寺)가 1203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면서 역사적으로 인도불교는 최후를 맞는데, 한때 ‘불교’ 인도라고 불려지던 인도의 불교가 13세기 이후 무엇 때문에 인도의 ‘한미한 불교’로 전락해 버렸을까. 지난해 3월5일 인도 뭄바이에 도착, 칸헤리 석굴에서 취재를 시작하며 가졌던, 아니 출발하기 전부터 줄곧 품어왔던 “인도불교는 왜 쇠퇴했는가”하는 의문은 엘로라·아잔타·산치 유적을 보는 동안 더욱 커졌다. 아잔타 같은 세계적 유산을 남긴 인도불교가 사라졌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천여 년 동안 망각 속에 있던 아잔타 동굴은 햇빛을 보았는데, 아잔타를 만든 불교는 인도에서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단 말인가.” 한탄만 나왔다.
바이샬리·쿠시나가라·붓다가야·파트나·쉬라바스티·룸비니 등을 취재하는 동안에도 ‘그 원인’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인도의 ‘나란다 유적’과 파키스탄의 ‘탁실라·페샤와르 유적’을 답사하는 동안에 이유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카필라바스투 궁성 유적으로 간주되는 네팔의 틸라우라코트 유적에서 진행된, 힌두교도들의 의식을 참관하는 사이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든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이슬람의 동점’이 불교쇠퇴의 주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같은 ‘이슬람의 칼’ 속에서 힌두교는 존속하고 불교만 사라졌다는 것은 무언지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가자 응집할 독자적 의례없어
인도대륙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과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대략 이렇다. 인도불교 쇠퇴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불교의 학문화”다. 5세기 전반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나란다대학이 창건됐다. 7세기 당나라 현장스님이 도착했을 당시 나란다는 이미 예불당, 승원, 탑 등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일반사회와 유리된 대 사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불교가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나란다에서의 토론과 공부를 통해 ‘불교는 학문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8세기 9세기 10세기를 거치며 불교는 점차 거대한 승원 안에서,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비호를 주로 받으며, 일반과 유리돼 갔다. “학문연구를 핵으로 하는 이러한 불교는,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의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존재의 실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일본 나라 야스아키 교수).” 승원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자기들끼리의 지적 유희에 빠져있는 사이 대중들은 불교에 등 돌리고 힌두교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다대학과 비크라마쉴라사 등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사원에 있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인도불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대중적 지지가 없는, 대중의 생활에 지침이나 도움을 주는데 인색했던 ‘학문적 불교’의 예정된 말로였다고나 할까.
물론 ‘불교의 학문화’만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보다 직접적인 것은 재가조직의 결여, 포교에 대한 열망이 수그러든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불교가 출세간의 종교로 사회와 단절된 교단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출가조직을 도울 재가조직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불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 있었다. 그런데 불교만 사라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인도 보팔 부근의 파우니 스투파 터> 사진설명: 불교 스투파가 있었던 곳에 힌두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는 나란다나 비크라마쉴라사 같은 거대한 승원을 갖고 있었으며, 돌이나 벽돌로 건조된 승원들은 견고한 장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스님들은 모두 누런 가사를 입는 등 보통 사람의 복장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이 정연하게 걸식하는 모습은 군대를 연상케 함으로써 침입자인 이슬람교도들의 적개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민중의 종교로, 일반인의 사회생활 속에 완전히 용해돼 있었다. 신상(神像)을 모시는 사원도 규모가 작고, 소위 ‘교단조직’이란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힌두교를 멸망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셈이 된다. ‘이슬람의 칼’도 힌두교를 멸망시킬 수는 없었으며, 불교를 멸망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힌두교를 도운 셈이 됐다.”
인도불교의 쇠퇴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중 하나가 ‘불교의 힌두화’다. 불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불타의 세계〉 등에 의하면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 ‘힌두세계 속에 제대로 정착한 불교도’ 집단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교가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 밖에 독자적 집단으로 존재하지도 못했다. 불교도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응집시킬 ‘독자적인 생활규칙이나 통과의례’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의례다. 출가자들은 승원 안에서 자기들의 규칙에 의거해 수행하면 되지만, 재가자들은 의례에 의해 불교 신도가 되고, 의례에 참여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불교에 대한 신심도 깊어간다.
그런데 불교는 굽타시대(기원후 320~500) 이전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독자적인 의례가 없었다. 힌두교 의례를 차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힌두교식 의례에 참여한 불교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힌두화 돼 갔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의례가 힌두화되자, 불교는 점차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에서 각종 신들마저 차용해 왔다. 그러다 결국 불교는 힌두교에 용해되고 말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이다.
반면 자이나교는 달랐다. 자이나교도 힌두교의 신들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여주었다.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인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고, 12종의 통과의례도 갖고 있었다. 자이나교도들은 힌두세계 속에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이나교는 지금도 인도에서 나름의 교세를 유지하며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힌두교에 용해된 불교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정체성 잃고 힌두교 속으로 용해
사진설명: 부서진 산치대탑 주변의 승원.
‘불교의 힌두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불교는 인도에서 쇠퇴했다. 전쟁이나 급격한 혁명적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방식으로 힌두에 용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독립인도의 초대수상 네루는 자신의 저서〈인도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난폭한 수단에 의해 근절되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힌두교도의 지배층과 민중 층에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 교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때때로 지방에서 충돌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정치적 원인에서 야기됐고, 본질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아무리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불교에 의해 힌두교가 밀려나간 사실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힌두교는 여전히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불교는 자연사(自然死)했다.”
이만큼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을 정확히 꿰뚫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살(自殺)도 아니고, 타살(他殺)도 아닌 자연사가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이었다. 병에 걸려 오래 동안 앓다가 자연히 죽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노쇠하여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자연사. 인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흥했던 인도불교는 결국 정체성을 상실한 채 힌두사회에 용해(溶解)돼 자연사하고 말았다. 자신의 땅에서 버림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한 집단이든 한 종교든 한 사람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배들에게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한국불교는 자연사한 인도불교로 부터 분명하게 배워야 될 것이다.
인도·파키스탄·네팔·아프가니스탄=조병활 기자 bhcho@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자들 **
암베드카 개종에 중흥불길
다르마팔라는 순교 헌신
사진설명: 2002년 4월14일 인도 델리에서 거행된 암베드카 박사 탄신 111주년 기념행사 모습.
현대에 들어와 인도불교는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암베드카’(1891~1956) 박사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다. 불가촉천민 집안에서 태어난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 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로 개종했다. 1947~1951년엔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였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불교로 개종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길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암베드카는 1956년 10월15일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3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개종식을 갖고 ‘신불교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 인도에서 불교인구는 점차 증대하기 시작했다.
암베드가 박사와 함께 현대 인도불교 부흥(復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다르마팔라는 현대 인도불교 탄생을 위해 순교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도불교 재탄생을 위해 대보리회(Maha Bodhi Society)를 결성했으며, 부처님 관련 성지 유적을 보호하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는 운동도 주도했다. 특히 붓다가야에 있는 대보리사를 힌두교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결국 대보리사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바라나시의 브라만 가정에 태어나 새 몸으로 다시 대보리사를 위한 투쟁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죽을 만큼,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였다. 2003-05-03 오후 9:03:58 수정
네이버 까페 <불교수련>
50.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 민중과 단절된 불교…승원에 갇혀 ‘몰락’ <아잔타 석굴> 사진설명: 아잔타 석굴 같은 훌륭한 석굴은 있어도, 그런 석굴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현재 인도불교의 모습이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랐던 부처님의 땅 인도.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퇴하게 됐을까. 기원전 5세기 탄생돼 1천년 동안 사상적·문화적·종교적으로 인도대륙을 쥐락펴락 했던 인도불교. 인도불교를 발전시키고, 쇠미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동인도에 있던 밀교의 본거지 비크라마쉴라사(寺)가 1203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면서 역사적으로 인도불교는 최후를 맞는데, 한때 ‘불교’ 인도라고 불려지던 인도의 불교가 13세기 이후 무엇 때문에 인도의 ‘한미한 불교’로 전락해 버렸을까. 지난해 3월5일 인도 뭄바이에 도착, 칸헤리 석굴에서 취재를 시작하며 가졌던, 아니 출발하기 전부터 줄곧 품어왔던 “인도불교는 왜 쇠퇴했는가”하는 의문은 엘로라·아잔타·산치 유적을 보는 동안 더욱 커졌다. 아잔타 같은 세계적 유산을 남긴 인도불교가 사라졌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천여 년 동안 망각 속에 있던 아잔타 동굴은 햇빛을 보았는데, 아잔타를 만든 불교는 인도에서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단 말인가.” 한탄만 나왔다.
바이샬리·쿠시나가라·붓다가야·파트나·쉬라바스티·룸비니 등을 취재하는 동안에도 ‘그 원인’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인도의 ‘나란다 유적’과 파키스탄의 ‘탁실라·페샤와르 유적’을 답사하는 동안에 이유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카필라바스투 궁성 유적으로 간주되는 네팔의 틸라우라코트 유적에서 진행된, 힌두교도들의 의식을 참관하는 사이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든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이슬람의 동점’이 불교쇠퇴의 주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같은 ‘이슬람의 칼’ 속에서 힌두교는 존속하고 불교만 사라졌다는 것은 무언지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가자 응집할 독자적 의례없어
인도대륙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과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대략 이렇다. 인도불교 쇠퇴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불교의 학문화”다. 5세기 전반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나란다대학이 창건됐다. 7세기 당나라 현장스님이 도착했을 당시 나란다는 이미 예불당, 승원, 탑 등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일반사회와 유리된 대 사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불교가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나란다에서의 토론과 공부를 통해 ‘불교는 학문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8세기 9세기 10세기를 거치며 불교는 점차 거대한 승원 안에서,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비호를 주로 받으며, 일반과 유리돼 갔다. “학문연구를 핵으로 하는 이러한 불교는,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의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존재의 실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일본 나라 야스아키 교수).” 승원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자기들끼리의 지적 유희에 빠져있는 사이 대중들은 불교에 등 돌리고 힌두교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다대학과 비크라마쉴라사 등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사원에 있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인도불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대중적 지지가 없는, 대중의 생활에 지침이나 도움을 주는데 인색했던 ‘학문적 불교’의 예정된 말로였다고나 할까.
물론 ‘불교의 학문화’만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보다 직접적인 것은 재가조직의 결여, 포교에 대한 열망이 수그러든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불교가 출세간의 종교로 사회와 단절된 교단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출가조직을 도울 재가조직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불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 있었다. 그런데 불교만 사라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인도 보팔 부근의 파우니 스투파 터> 사진설명: 불교 스투파가 있었던 곳에 힌두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는 나란다나 비크라마쉴라사 같은 거대한 승원을 갖고 있었으며, 돌이나 벽돌로 건조된 승원들은 견고한 장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스님들은 모두 누런 가사를 입는 등 보통 사람의 복장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이 정연하게 걸식하는 모습은 군대를 연상케 함으로써 침입자인 이슬람교도들의 적개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민중의 종교로, 일반인의 사회생활 속에 완전히 용해돼 있었다. 신상(神像)을 모시는 사원도 규모가 작고, 소위 ‘교단조직’이란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힌두교를 멸망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셈이 된다. ‘이슬람의 칼’도 힌두교를 멸망시킬 수는 없었으며, 불교를 멸망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힌두교를 도운 셈이 됐다.”
인도불교의 쇠퇴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중 하나가 ‘불교의 힌두화’다. 불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불타의 세계〉 등에 의하면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 ‘힌두세계 속에 제대로 정착한 불교도’ 집단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교가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 밖에 독자적 집단으로 존재하지도 못했다. 불교도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응집시킬 ‘독자적인 생활규칙이나 통과의례’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의례다. 출가자들은 승원 안에서 자기들의 규칙에 의거해 수행하면 되지만, 재가자들은 의례에 의해 불교 신도가 되고, 의례에 참여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불교에 대한 신심도 깊어간다.
그런데 불교는 굽타시대(기원후 320~500) 이전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독자적인 의례가 없었다. 힌두교 의례를 차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힌두교식 의례에 참여한 불교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힌두화 돼 갔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의례가 힌두화되자, 불교는 점차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에서 각종 신들마저 차용해 왔다. 그러다 결국 불교는 힌두교에 용해되고 말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이다.
반면 자이나교는 달랐다. 자이나교도 힌두교의 신들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여주었다.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인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고, 12종의 통과의례도 갖고 있었다. 자이나교도들은 힌두세계 속에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이나교는 지금도 인도에서 나름의 교세를 유지하며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힌두교에 용해된 불교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정체성 잃고 힌두교 속으로 용해
사진설명: 부서진 산치대탑 주변의 승원.
‘불교의 힌두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불교는 인도에서 쇠퇴했다. 전쟁이나 급격한 혁명적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방식으로 힌두에 용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독립인도의 초대수상 네루는 자신의 저서〈인도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난폭한 수단에 의해 근절되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힌두교도의 지배층과 민중 층에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 교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때때로 지방에서 충돌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정치적 원인에서 야기됐고, 본질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아무리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불교에 의해 힌두교가 밀려나간 사실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힌두교는 여전히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불교는 자연사(自然死)했다.”
이만큼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을 정확히 꿰뚫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살(自殺)도 아니고, 타살(他殺)도 아닌 자연사가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이었다. 병에 걸려 오래 동안 앓다가 자연히 죽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노쇠하여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자연사. 인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흥했던 인도불교는 결국 정체성을 상실한 채 힌두사회에 용해(溶解)돼 자연사하고 말았다. 자신의 땅에서 버림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한 집단이든 한 종교든 한 사람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배들에게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한국불교는 자연사한 인도불교로 부터 분명하게 배워야 될 것이다.
인도·파키스탄·네팔·아프가니스탄=조병활 기자 bhcho@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자들 **
암베드카 개종에 중흥불길
다르마팔라는 순교 헌신
사진설명: 2002년 4월14일 인도 델리에서 거행된 암베드카 박사 탄신 111주년 기념행사 모습.
현대에 들어와 인도불교는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암베드카’(1891~1956) 박사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다. 불가촉천민 집안에서 태어난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 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로 개종했다. 1947~1951년엔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였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불교로 개종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길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암베드카는 1956년 10월15일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3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개종식을 갖고 ‘신불교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 인도에서 불교인구는 점차 증대하기 시작했다.
암베드가 박사와 함께 현대 인도불교 부흥(復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다르마팔라는 현대 인도불교 탄생을 위해 순교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도불교 재탄생을 위해 대보리회(Maha Bodhi Society)를 결성했으며, 부처님 관련 성지 유적을 보호하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는 운동도 주도했다. 특히 붓다가야에 있는 대보리사를 힌두교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결국 대보리사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바라나시의 브라만 가정에 태어나 새 몸으로 다시 대보리사를 위한 투쟁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죽을 만큼,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였다. 2003-05-03 오후 9:03: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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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y 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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