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12, 2012

캄보디아불교의 문화사


캄보디아불교의 문화사

(Buddhism in Cambodia)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의 불교학전공



지도교수



해주스님(海注스님)

이름

린사로



2012년 5월















목차

Ⅰ.서론

Ⅱ.본론

1.캄보디아불교의 역사

1)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앙코르 제국 멸망까지

(1) 부난 시대 불교(Phu Nan)

(2) 짠라 시대 불교(Chenla)

(3) 앙코르 시대 불교(Angkor)

2) 앙코르 제국의 소승불교 등장

3)앙코르 제국 멸망 이후의 소승불교

2. 프랑스 보호령 밑의 캄보디아불교

3. 포르포드 정권의 캄보디아불교

4.포르포드정권 이후의 캄보디아불교

5.현재의 캄보디아불교

1) 캄보디아불교 종단

2) 캄보디아불교 교육

3) 캄보디아불교 명절

Ⅲ.결론

참고 문헌



Ⅰ.서론

캄보디아 불교는 소승불교라고 한다. 불교는 캄보디아 땅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한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다. 연구 결과를 통해서 불교가 캄보디아에서 등장하는 것은 1~2세기다. 캄보디아 불교는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들어왔을 때는 소승불교인데 시간이 지나서 대승불교도 들어왔다. 대승불교하고 소승불교가 캄보디아에서 발전하고 13세기 중반에 소승불교가 국교가 됐다. 포르포드 정권(1975~1979)을 빼고 불교가 캄보다이의 땅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불교학자하고 불교 기록문을 통해서 불교가 2300년쯤이 된다고 주장했다. 불교가 크메르인의 전통문화가 되고 크메르인 95% 불교를 신봉하고 크메르인의 삶의 생활 방식이 된 것이다. 크메르인이 불교가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주장했다. 크메르인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불교를 밀접하게 살아왔다. 불교는 크메르인의 삶의 자체에 들어가서 생활 방식의 정신이 불교를 가지고 있다. 불교는 캄보디아에서 큰 역할을 가지고 사회적인 역할이 된 것이다. 지금은 캄보디아 불교가 인도불교나 다른 나라불교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해왔고 캄보디아불교식으로 됐다.

캄보디아불교는 2300여년이 지나서도 캄보디아에서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불교가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온 것이 있고 말할 수 없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온 것도 있다. 캄보디아역사를 보면 불교가 힌두교의 뒤에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불교 내에는 힌두교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힌두교가 캄보디아 땅에 없애지만 그의 영향을 불교에 들어간 것을 말할 있다. 힌두교의 영향을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밀교의 영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 왜 힌두교, 대승불교, 소승불교가 캄보디아 땅에 들어와서 같이 발전하면서 영향을 서로 반은 것이 이직까지 발견하지 않다. 대승불교가 캄보디아 땅에서 사라져버린 원인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소승불교가 13세기부터 이 나라에서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캄보디아 역사는 기원후 1세기 초에 푸난이 건국한 후에는 힌두교하고 불교가 존재했지만 힌두교가 1000년 동안 국교로서 역할을 해왔고 불교는 제2 종교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앙코르 시대에 들어와서 불교의 역할이 더 많아 졌으며 때때로 불교가 국교가 된 것이다. 13세기 중에 소승불교는 대승불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된 것이다. 역사학자와 종교연구자들을 의하묜 1세기에 힌두교와 불교가 등장한 것은 두 종교가 1세기 초에 캄보디아 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두 종교가 조금 더 이른 시기에 들어온 것을 말한 것이다.

Ⅱ. 본론

  1. 캄보디아 불교 역사

캄보디아 불교 역사를 말하면 불교가 언제에 캄보디아에 들어왔느는 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캄보디아 불교는 전국 어디에 가도 불교사찰을 찾아볼 수 있고 어디에 가서 물어봐도 스스로를 불자라고 답하지만 불교가 언제에 들어오고 처음에 어디로 들어왔는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외국의 침입을 받고 국내에서도 전쟁이 빈번해서 역사적인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기원후 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석조나 돌로 기록해놓은 자료를 통해서 캄보디아 역사를 알 수 있다. 아니면 중국의 역사기록을 통해서만 역사와 옛 크메르인의 생활 방식을 알 수 있다. 15세기부터는 석조나 기록문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왕실 기록문이나 외국인의 기록문을 통해서만이 캄보디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특히 불교가 어떻게 발전한지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 1863년에 프랑스 식민지가 캄보디아에 들어왔을 때,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캄보디아 역사와 캄보디아불교의 연구를 시작해서 20세기 초에는 캄보디아역사, 불교, 전통문화의 연구 기관 등을 문을 연 것이다. 그런데, 70년대에 냉전을 시작되고 나서 캄보디아역사 기록문이나 불교 연구 자료가 거의 다 파괴되었다. 2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캄보디아 불교가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1979년대에 캄보디아 불교가 다시 힘들게일어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불교가 캄보디아의 땅에서 등장하는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캄보디아 역사에는 두 종교가 건국 시기 때부터 지금까지 등장해 오고 있다. 힌두교는 앙코르 시대부터 점차 영향이 약해지면서 13세기에 힌두교가 없어버렸다. 힌두교의 흔적이 불교 내에서만 남아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1) 처음 시작한 때부터 앙코르 제국 멸망까지

(1) 부난 시대(Phu Nan)

캄보디아 역사는 받덤벙 지방의 라앙스피안(La Ang Spearn)에서 4200년에 시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국가의 공동체를 구성한 것이 아니고 민족의 공동체를 구성한 것이었다. 그 공동체는 정식적인 종교를 가지고 믿은 것이 아니고 자연의 신을 모시고 숭배한 것을 주장했다.

크메르족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사실은 현재의 일상생활 속에는 찾아볼 수 있다. 외래의 종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크메르인이 자연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서 자연 신앙과 융합되서 실천되어 갔다. 정식으로 국가를 구성하기 이전에는 외래문화와 외래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은 후에 국가를 구성한 것이다. 국가를 건설하는 개국전설을 통해서 보면 캄보디아의 여왕이 인도의 왕자와 서로 싸워서 여왕이 그 전쟁을 져서 그 이유로 인도왕자와 결혼했다고 전한다. 그 전설을 근거로 캄보디아라는 국가가 그 때부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역사의 근거는 1세기부터 부난(Funam)이라는 국가가 건국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부난(funan)에 살고 있었던 크메르인들이 인도에서 들어왔던 종교를 숭배했다고 한다. 인도로부터 들어왔던 종교는 힌두교와 불교를 말한다. 그런데 힌두교는 불교보다 일찍 캄보디아에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부난이라는 말은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지배했다고 했고, 메콩 강 중류에서 메콩 강 하류까지 진출했으며 짜이와프라야(Choa Praya)강 중류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말레이시아 반도까지 지배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왕족과 귀족은 힌두교(Hindu)를 숭배하고 서민이나 일반인은 자연신과 불교를 숭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 남부의 포가잉(vokang)에 있는 산스크리트어(2세기~3세기)의 불교 기록문에 의하면 스라야마라(Sreya Mara)왕이 최초로 불교를 숭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난 왕이 힌두교를 국교로 선언했지만 불교를 인정하고 국민들이 믿고 있었던 종교는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앙코르 보라이(Ang kor borey)지방에 있는 부남 수도에서는 불교 기록문, 금상, 은상, 동상, 목조 등이 발견되었다. 그 불상들은 남 인도의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며 칸타라(Khanthara)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근거는 부남시대에는 불교가 캄보디아 땅에서 발전하고 사회적으로 활발한 역할을 가졌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자료의 근거는 왓 룸록(Wat Rum lok)에 있는 기록으로 부난 시대에 불교를 공부하고 연구한 승려들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불교와 힌두교를 믿은 사람이 반반이었다고 한다. 불교 흔적은 부난 수도의 앙코르 보라이 근처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의 태국의 땅에서도 발견된다. 그 발견된 흔적은 불교가 부난국 전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국내기록문 외에도 중국의 기록문도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5세기에 부난을 방문했던 중국인들이 부난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문을 남기고 있다. 눈여겨 볼 기록문은 479~502년 부난 승려(Nagasena)가 역경하기 위해서 중국에 파견되었다는 기록이다. 나가세나 스님이 중국에 가서 중국 왕을 만나고 부난의 정치, 경제, 종교, 국민의 삶을 왕에게 말해준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때에 부난의 왕이 불경과 불상을 보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해인 460~524년에 부난의 두 명의 스님이 중국에 파견되었고 그 두 스님(만드라센(Mandrasena, 상카바라(Sanghapala)이 오래동안 중국에서 불경을 번역하고 거기에서 입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구에 의하면 상카바라스님이 중국에 파견될 때는 불경을 가지고 가서 번역했다고 한다. 스님이 중국에 가지고 간 불경의 이름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불경이라는 사실을 학자들이 확인했다. 그 불경의 이름이 위무디마가(Vimuttimagga)라고 불린다. 요즘은 캄보디아 불교학자들이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고 그 불경을 크메르어로 번역하고 있다. 거의 10년이 지났는데 아직 안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

학자들의 주장을 통하면 상카바라(Sanghapala)스님은 소승스님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으며 그 스님이 대승스님이라고 주장이 있다. 어떤 학자는 그 스님이 스리랑카에 건너가서 불교를 공부했다고도 하며 또 어떤 학자는 그 스님이 부난에서 공부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록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어도 학자들은 그 스님이 대승스님이라고 말하는 공통 점이 있다. 왜 그런 의견이 있는 것인가? 그 스님이 번역해놓은 것은 거의 대부분이 대승경전과 관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난에서 중국으로 가져 갔던 경전들은 거의 다 대승불교의 경전이었다. 다른 의견은 스님이 번역해놓은 경전들이 밀교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님이 대승승려이지만 소승의 경전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스님의 번역본이 아비담아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 경전의 머리말에도 그는 아비담아 불교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는 부안의 승려 수보디(Subhuti)스님이 중국에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남긴 번역본은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 스님이 무슨 불경을 번역했으며 중국의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이 부난의 왕이 승려를 파견한 것은 상카바라스님의 불경의 번역을 도와주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상카바라스님의 번역본에는 수부디스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서 수부디스님은 개인적으로 중국에 갔다고 추측되고 있다.

5세기 중반에는 중국의 승려(륜보,Yunboa)가 부난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륜보 스님이 부난의 경치, 정치, 국가, 경제, 종교 등을 기록해놓고 있다. 스님의 기록문은 부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스님의 기록문이 없었다며면 부난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내의 기록문이 남아 있어도 복잡한 이야기가 많고 연구하기가 어렵다고들 말한다. 특히 부난 당시의 종교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스님의 기록은 부난의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무슨 옷을 입었는지, 왕실의 의례, 서민의 신앙, 결혼식, 장례식까지를 설명해 놓고 있는 것이다.

514~550년에 루드라와라만(Rutravaraman)부난 왕이 중국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대표단이 부처님의 사리와 부처님의 12개 머리카락하고 불경을 중국 왕에게 보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해에는 루드라와라만왕이 240 개의 불경을 다시 보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학자에 의하면 그 240개 경전들은 인도에서 받은 것인지 아니면 부난에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의견이 그 경전들은 부난 왕이 인도에서 받아서 중국에 보내준 것이다고 주장한다. 어떤 학자는 그 경전들은 그 당시에 부난의 불교가 발전하고 융성하면서 부난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그 경전은 상카바라스님이 작성하였기 때문에 루드라와라만왕이 그 경전들을 스님에게 참고로 보내주었다고 말한다.

7세기의 돈레바디(Takoav province)에서 발견했던 산스크리트어로 새겨놓은 기록문에 의하면 부난 왕 루드라와라만하고 짜야와라만왕이 삼보를 예경하였으며 부처님의 사리를 숭배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 의하면 부난의 두 왕자가 힌두교의 시바 신을 숭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왕자가 힌두교신에게 물품을 바쳤다고 한다. 역사학자가 그 의견에 동의한 것이다. 두 왕이 힌두교신을 숭배했지만 불교도 지원해주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커지면서 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국왕이 서민의 종교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회적인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부난 시대의 불교는 임금에 의해서 가끔 찬란한 불교의 시대가 되고 가끔은 약해지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불교가 부난 시대 500여 년 동안에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당시의 불교의 영향은 서민층을 파고 들어간 것뿐만 아니라 지배층까지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2) 쩬라 시대 (Zhan)

부난 시대는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의 500년까지를 말한다. 부난은 주변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아서 6세기쯤에 멸망했다. 부난이 멸망한 후에는 새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그 왕조는 쩬라(Zhenla)라고 한다. 부난 왕조가 멸망하고 나서 수도도 캄보디아의 현재 북동쪽에 있는 이산나보라(ISANNABORA, 현재의 이름이 섬보프레이꼽)으로 옮겼으며 그 옛 수도는 아직까지도 많은 유적을 가지고 있다.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로 수백 개의 석탑을 발견되었다. 그 수백 개의 석탑과 사원 조각 중에는 관세음상도 있음이 밝혀졌다. 그것 뿐만 아니라 다게아 지방에 있는 다프룸 사원에서도 관세음상(Lokesvara)을 발견되었다. 쩬라의 힌두교 신상이나 불교의 석상과 다른 조각상들이 거의 대부분 옛 왕조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분난의 석조나 불상들은 힌두신상과는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분난의 석상들이 인도의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은 비슷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쩬라의 석상들이나 사원의 양식 등이 점점 크메르의 양식을 이루고 있는 점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옛 크메르인의 의도가 인도의 양식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쩬라 시대부터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석조와 불상에는 대부분 그 당시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보다 영향을 많이 주었지만 쩬라의 남부지방에서도 소승불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다프룸사원하고 트라웬 지방에서 처음으로 빨리어 기록문을 발견되었다. 빨리어 기록문이 발견된 것은 쩬라시대에 소승불교가 널리 퍼져있었다는 의견이 있다. 그런 의견이 많이 있어도 학자들 사이에는 쩬라시대에는 힌두교와 대승불교를 숭배한 사람들이 소승불교를 숭배한 사람보다 많았다고 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힌두교의 사원이나 석조나 석탑 등은 불교의 것보다 많이 남아 있다. 쩬라시대에는 불교가 영향이 약해졌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그런데 불교가 쩬라시대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의견에는 덩의를 하지 않는다. 그 시대에 불교가 사라져 버렸다면 왜 불상이나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 등이 발견된 것일까? 지배층은 힌두교를 숭배했고 서민층은 옛 불교 전통 문화를 지키고 숭배한 것을 주장하고 있다. 섬보프레이꼽(Sambor Prei Kuk)에서 626년의 기록문에 불교를 삼신에게 바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791년에 새긴 관세음상과 지장상을 발견되고 있다.

쩬라의 임금 파와와라만 2세(Bhavavaraman)가 639년에 힌두교, 불교를 신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왕이 사원들의 힌두교신에게 제물을 바친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의 삼신을 묘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중국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쩬라인이 다신교를 신봉한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왓 프레이 위아(Wat Prei val)의 기록문에 의하면 쩬라의 남부 지방에서는 소승불교가 그 지방 서민들이 불상을 모시고 숭배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당시에는 제일 유명한 불교학자로서 두 스님이 있었다. 그 두 스님은 귀족과 왕조와 관계를 가졌으며 왕조가 스님에게 넓은 땅을 올리고 큰 절을 지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절이 이직까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절은 왓프레위아라는 많은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왓프레위아의 전설은 그 이야기를 묘사해놓고 있다. 대부분의 의견은 불교학자인 두 스님이 소승불교 승려였다는 연구 증거 자료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두 스님이 어떻게 왓 프레위를 지었는 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왓프라티아도에서 빨리어 기록을 발견되기도 했다. 옛 쩬라 땅에 있는 프라잔부리에서 발견되었던 761년에 기록해놓은 빨리어 기록문이 남아 있다. 엄삘로룸(Ampilrolum)에서 발견한 기록에서 귀족과 서민들이 불교신의 관세음보살을 숭배했던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씨엠립 지방에 있는 프라사드 다감(Phrasat ta keam)에서 791년의 관세음상하고 jakadisvara상을 발견했다.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왜 쩬라시대에는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같이 발전하였는가 하는 많은 의견이 있다. 어떤 학자는 대승불교가 힌두교 교리와 서로 영향을 받고 두 종교가 신을 숭배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며 그 당시에는 두 종교가 지배층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서민층에도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다른 의견은 그 당시에는 캄보디아가 자바 섬(Indonesia)으로부터 자주 침입을 받아 Srivijaya국의 대승불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의견도 있다. 그 당시에는 인도 북부에 있는 Nalanda불교대학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 연구자, 수행자, 법구자등이 거기에 들어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자기의 나라에서 포교한 결과라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면 8세기쯤에는 중국인 수행자가 나란다대학에 들어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중국에 돌아와서 중국에서 포교한 점이 비슷하다고 한다. 다른 의견은 그때의 대승불교가 순수한 대승불교가 아니고 밀교(Tantric) 사상을 합쳐서 새로운 쩬라불교가 나타난 것을 말했다. 그런데 적당하고 많은 생각이 인정을 받는 것은 쩬라 대승불교가 벵갈 지방하고 자바 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위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쩬라시대에는 힌두교나 대승불교를 숭배했던 이야기가 많은데, 소승불교 유적이나 기록도 많이 발견된다. 그런 증거로보면 소승불교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승불교의 영향이 얼마정도 였는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600년부터 800년까지 발견됐던 불상은 거의 대부분이 대승불상이다. 쩬라시대부터 대승불교가 캄보디아 역사상에 등장했기 때문에 앙코르시대에 들어와서 대승불교가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하는 많은 의견이 있다.

(3) 앙코르 제국시대의 불교

앙코르시대는 크메르인의 풍부하고 찬란한 시대를 말할 수 있다. 크메르인은 그 시대를 생각하면 잘 살고 잘 먹고 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시대를 생각할 때에는 자랑스러운 감정을 포현하는 것이다. 그 시대를 500여 년이 지났어도 눈앞에 있듯이 상상하는 것 같다. 그들은 그때를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 시대의 유적지나 사원이나 석조나 조각 등을 관람하면서 사람의 정신이 그 시대에 들어간 것 같다. 사원을 살펴보고 자세히 구경하면 잘 산 시대도 느껴진다.

그 수 천 개의 사원이나 석상이나 조각상 등을 보면 그 사원들을 계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어디에서 교육을 받고 그 완벽한 사원들을 만들 수 있는가? 그 시대의 작업을 한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 시대에는 불교가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앙코르 시대를 시작한 시기는 쩬라왕조가 내전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전쟁이 생긴 것 뿐만 아니라 외국의 침입을 받았다고 한다. 앙코르 시대를 시작하기 전에 자바 섬(Srivijaya)에 있는 스레야비자야왕조를 침입하고 캄보디아 국을 스레비자야왕조의 식민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8세기 초에는 캄보디아왕조가 어떻게 된지를 알 수 없었는데, 트렁기아의 역사책에 의하면 스레야비자야왕조를 침입한 후에는 대부분의 왕조나 귀족들을 죽여 버리고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숲 속으로 도망하였다고 써놓고 있다.

9세기 초에는 들어와서 잡혔던 캄보디아왕족 사람 중에는 한 명이 자바 섬에서 도망해왔고 다시 캄보디아로 들어왔다. 캄보디아에 들어오자마자 패한 왕족과 귀족이 국민의 힘을 모아서 스레비자야국의 식민지를 반대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캄보디아 군이 스레비자야군에 승리하여 802년에는 앙코르왕조를 건립했다고 기록은 남기고 있다.

처음으로 새 왕조를 건립한 것이 자야와라만 2세가 캄보디아 전국에 여기저기에 다니면서 수도를 세우기 좋은 땅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의 수도는 검봉짬 지방에 있는 번디아프레이노코에 성립되었고 국명은 인드라보라라는 정했다. 거기에서 시작한 지 얼마나 안돼서 씨엠립 지방 15Kg 동쪽에 있는 하리하라라이에서 두 번째 수도를 세웠다. 얼마 후에는 씨엠립 지방 북쪽마헨드라버라바드에 옮긴 것은 기록이 있다. 꾸렌산에서 캄보디아 수도를 정하고 802년에는 독립국임을 선언했다고 주장했다. 그 때부터 앙코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야와라만 2세(802~850)

첫 앙코르 시대임금은 어려운 상황의 나라를 복원하고 힌두교의 사원을 수백 개를 지어놓은 것을 기록했다. 자야와라만 2세 시대에는 힌두교를 왕조하고 귀족이 신봉했지만 불교 유적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품다드루(Ta Tru village)에서 발견했던 기록문은 임금하고 귀족, 서민들이 관세음(Lokesvara)에게 숭배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국왕이 힌두교를 숭배했지만 다른 종교를 인정해준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승불교를 말한 것이다. 소승불교는 서민층에서만 신봉되어 졌다는 많은 의견이 있다. 아람룽젠사원(Aram Rong Chen)에서도 그 시대에 불교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자야와라만 2세는 하리하라라이궁궐에서 사망하고 그 왕의 사리는 프라스꼬(Preah Ko)에서 매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야와라만2세 때의 종교는 힌두교와 불교라고 한다.

인드라와라만(877~887)

캄보디아 역사에서는 인드라와라만왕이 철학적이고 완벽한 지도자라고 하는 임금 중의 한 명이다. 즉위에 오른 후에는 인드라와라만왕이 나라를 계획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농업국가로서 수도 주변에는 바라이(Baray, 댐)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그 왕의 정책은 앙코르 시대에 풍부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져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농업을 개발한 후에는 국가 경제가 계속 융성했다고 한다. 그런 것들 뿐만 아니라 그 왕이 석조의 사원을 짓는 것을 시작했다. 현재에도 굉장한 사원들이 남아 있다. 그 사원은 씨엠립 지방의 동쪽의 15에 있는 바공(Bakong)사원이다. 이 사원은 자바 섬에 있는 불교사원(Borobudur)을 묘사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바공사원하고 Borobudur사원은 비슷한 양식과 비슷한 설립 시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바공사원은 힌두교신에게 바친 사원이고 Borobudur사원은 불교에게 바친 사원인 것이다. 같은 시기, 거의 같은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서로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이 많다. 힌두교 바공사원과의 Borobudur사원은 어느 쪽에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인가?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인드라와라만왕이 수도나 바라야를 성립한 방식은 농업을 개발한 것 뿐만 아니라 그 왕의 작업은 종교의 상징을 보여준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인도의 철학적을 숨기고 그 왕의 개인적인 철학을 묘사한 것이다. 수도나 사원을 건립한 것은 인도의 철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힌두교나 대승불교를 상징한 메르 산을 묘사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힌두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다. 두 종교의 세계관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묘사한 점이 많은 것이다. 인간의 세계나 천상의 세계를 설명해놓은 것을 보여준다. 삼계 육도의 사상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인드라와라만왕이 힌두교의 사상을 가지고 불교의 사상을 합쳐서 새로운 방책이 나타나고 사원이나 수도를 성립해서도 그 사상을 보여줄 생각으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왕의 시대에는 힌두교의 시바상과 비스누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불교신의 관세음보살상도 많이 발견됐다. 특히 앙코르 수도에 좀 멀리에 있는 지방들이다.

Ubon지방(현재 태국 땅)에 있는 반봉에서 드라이로가야나타(Trailokayanatha)보살상을 발견됐다. 앙코르 수도 근처에 있는 지방에서도 미륵보살상이 발견됐다.

인드라와라만왕 시대에는 힌두교가 국교로 인정됐지만 불교가 옛 시대처럼 일반인들 중에는 인기를 받고 일상생활에서도 불교식 삶이 이어졌더고 말하고 있다. 불교는 제2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힌두교신상과 함께 불교신상(대승불교)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야소와라만(880~890)

인드라와라만왕이 사망한 후에는 야소와라만왕이 즉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소와라만왕은 하리하라라이에서 앙코르 중심부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왕이 즉위한 후에는 바라이를 짓는 작업을 시작했다. 동쪽 바라이(야소타다그)를 지은 것은 야소타보라 수도로 폭넓은 수도권을 확장한 것을 말한다. 그 정책은 앙코르 시대에 더 진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국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캄보디아인들이 1년 동안에 세 번에 걸쳐 논농사를 짓을 수 있었다고하는 논문 발표가 적지 않은 것이다. 동쪽 바라이는 아직까지도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당시의 기록으로써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임금이 힌두교 수도자와 불교의 수행자를 위해서 수도원을 지어놓은 유적들이다. 그런 증거로는 야소와라만왕이 힌두교를 숭배하면서도 불교를 인정했다는 증거이다.

9세기 말에 지어놓았던 한 사원은 불교사원의 증거로써 남아 있다. 그 사원의 벽화에는 부처님의 본생 담이 새겨져 있다. 그 벽화 연구자에 의하면 데프 프러넘(Tep Pranam)사원이 진짜로 불교사원이었음이 명백하다고 한다. 힌두교의 사원이면 왜 사원의 입구에 부처님의 본생 담을 새겨놓았을까? 그 벽화의 양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승불교에서 볼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많은 의견이 뎊 프러넘사원이 소승불교사원임을 뒷받침 하고 있다. 그 사원의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부처님의 본생 담을 묘사하여 새겨놓고 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이 야소와라만왕이 힌두교왕이라고 말했는데 왜 수도 근처에는 불교사원을 지을 수 있냐고 의문이 생기고 있다.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런 큰 불교사원을 지을 수 없다고한다. 아니면 그 사원이 임금이 지은 것인가? 아직까지 그 의문을 아무도 확인하지 못 하는 상황이다. 이 사원의 기록도 남아 있었는데 그 분석하는 학자들이 같은 점을 조합할 수 없었다. 야소타보라의 동쪽으로 7km정도로 떨어진 곳에 한 불교사원이 남아 있다. 그 사원은 지금까지도 튼튼하게 서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야소와라만 시대의 불교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원의 이름은 프라사드 바트 쫌(Bat Chum)이라고 한다. 바트쫌사원의 기록문은 캄보디아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기록문은 글자가 잘 새겨져 있으며 명확한 예전의 크메르인의 글자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국어를 연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 기록문에 남아 있는 내용은 바트쫌사원은 야소와라만왕이 직접으로 지은 것은 아니고 그 지위가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그 사원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가록문의 머리말에는 임금에게 바친 글도 남아 있다. 나머지는 불교의 삼신에게 바친 글도 있다. 그 사원은 세 개의 탑을 가지고 있고 한 탑은 법신불에게 바치고 가운데의 탑은 보신불에게 바치고 옆의 탑은 화신 불에게 바친다고 설명해놓고 있다. 삼신은 힌두교에도 삼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원에서 새겨놓은 기록문은 불교의 삼신만을 묘사한다. 또는 삼신의 사상은 대승불교에서는 중요하다. 소승불교의 삼신 사상은 다른 방향을 가지고 삼신에 대해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증거 때문에 바트쫌사원은 대승불교사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원에 들어가는 문틀에는 대승보살 같은 것을 새겨놓지 않고 있다. 벽화는 부처님이 성불의 장면, 설법의 장면, 열반의 장면만을 새겨놓고 있다. 이 증거로는 많은 학자가 그 사원은 소승불교사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측면이다.

바트쫌사원에는 953년도에 새겨졌던 기록문이 하나 남아 있다. 그 기록문의 내용은 와윈드라리마타나(Vavindrarimathana)벼슬이 바트쫌사원을 지은 목적은 대승불교의 삼신에게 바치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탑은 관세음보살(Lokesvara)에게 바친 것이고 가운데의 탑은 Vajrapani보살에게 바친 것이고 그 옆의 탑은 Prajnaparamita보살에게 바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장 많은 의혹을 받는 한 힌두교의 사원은 바켕사원이라고 한다. 이 사원은 많은 학자가 힌두교사원이라고 했는데, 108개의 사원의 탑은 힌두교와 불교를 상징한다고 했다. 힌두교의 교리하고 불교의 교리 안에는 108번뇌의 특별한 상징을 가지고 있다. 또는 인간세계와 천상세계를 상징하는 것도 소중했다. 우주의 상장을 가지고 있는 힌두사원과 대승불교사원은 캄보디아 역사상에는 많이 나타나는 것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증거로서는 그 당시에는 불교가 국민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증거들은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나 힌두교보다 영향이 더 커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기록은 야소와라만왕이 시바신과 다른 힌두교신을 위해서 많은 석조 사원을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자야와라만 5세(968~1001)

기록에 의하면 자야와라만(Jayavaraman)5세는 힌두교의 시바(Shiva)파를 숭배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야와라만(Jayavaraman)5세 때에는 전 국왕 때부터 국가를 개발하는 것을 계속했다. 그 작업들의 중에는 사원을 짓는 일도 계속했다고 한다. 그 왕의 집권기에는 새로운 사원을 성립하고 그 중에는 힌두교의 사원이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메본(Mebon temple)사원에서 발견했던 기록은 자야와라만(Jayavaraman)5세왕이 불교를 인정해주고 지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중국 상인들일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상인이나 여행가들이 앙코르에 들어온 기록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기록들에 의하면 그 당시의 왕이 힌두교를 국교로 정하고 불교는 국가의 제 2 번째의 종교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의 행사가 있을 때에는 힌두교 수도승과 불교의 수행자가 초대를 받고 같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왓 시투이(Wat sithor, 968년)에 있는 기록의 첫 문장은 불교의 삼보(불. 법.승)를 거룩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자야오라만 5세의 왕권을 서술하고 있다. 이런 증거로서 불교를 일반 서민들이 신봉했을ㅇ 뿐만이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등도 불교를 신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왓 시투이에서 발견됐던 다른 가록문은 대승불교의 공사상하고 중관사상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결과로 볼 때, 자야와라만(Jayavaraman)5세 시대에는 대승불교가 힌두교와 등장했다.

소리야와라만 1세(Suriyavaraman, 1002~ 1050)

11세기 초에 들어와 캄보디아 왕조가 혼란한 시기를 당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소리야와라만 1세가 왕위에 올라간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왕이 불교의 역사상 처음으로 불교의 신자 중에는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즉위한 후에는 불교가 찬란한 시기를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소리야와라만 1세의 사명(죽은 사람의 이름)은 분명히 불교 신자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사명은 니완바드(Nirvana Pada)라고 칭해놓고 있다. 캄보디아 역사적에서는 국왕이 누가 힌두교의 신자이고 누가 불교신자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죽은 후에 이름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요즘까지도 국왕이 돌아가실 때에는 죽은 후에는 다른 이름을 바꿔주는 전통을 기지고 있다. 자기의 종교에 따라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소리야와라만 1세 왕은 불교를 신봉한 국왕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 역사상에는 소리야와라만1세 왕은 처음으로 죽은 후에 불교와 관련한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그 왕의 시대의 석조 사원들이 불교와 관련이 있다고한다.

1002년의 프라칸 검봉스와이(Phreah Khan Kompon svay)에서 발견했던 기록들은 국왕이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삼보에 귀의하고 힌두교의 삼신에게 귀의한 것을 기록해 내놓고 있다. 이런 것들이 국왕이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국민의 신앙을 포용하고 인정해준 감정을 보여주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국왕이 역할을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 당시에는 힌두교의 영향이 아직 크기 때문에 임금이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피마이(Phi Mai크메르사원)사원에서 발견했던 기록은 국왕이 불교를 신봉하고 다른 종교나 사상을 포용하고 인정했다고 새겨놓고 있다.

그 시절에는 국가의 안전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행복하게 잘 살고 국토도 자와프라야(Chao Phraya)강 지방까지 넓어졌다고 기록이 남기고 있다.

로보리(현재의 태국 땅)에서 발견했던 기록문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국왕의 도움으로 대승불교의 수행자와 소승불교의 출가자를 위해서 수도원을 많이 지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또 그 기록은 불교와 힌두교는 같이 조화를 이루고 평화스럽게 같이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기록해놓고 있다.

자야와라만7세(JayavaramanⅦ, 1181~1218)

자야와라만7세은 캄보디아의 제일 찬란한 시기를 가지고 자랑스러운 시기를 말하는 것이 당연이다. 이 시기에는 캄보디아의 역사상에는 경제의 발전이 최고 정점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국민은 안전하고 평화스러운 시기를 지냈다고 한다. 그 왕이 이직까지 크메르인의 마음속에 살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800여 년간을 지나서도 그 왕의 자비심은 캄보디아인에 남아 있다. 요즘은 어디에 가든지 자야와라만7세의 석상. 조각상. 금상. 은상. 동상. 목조까지 만들어놓고 있다. 또는 공용 장소에도 그 왕의 조각상을 모시고 전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크메르인의 후손들이 그 왕을 기념하기 위해서 새겨내는 것이다. 20~30년간 동안에는 크메르인들이 정신이 없어지고 외국의 공격을 받고 같은 민족끼리도 싸웠던 것이다. 내전이 끝나고 나서 크메르인들의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 위해서 자야와라만7세의 발자국에 따라 가려고 해서 그 왕의 석상을 전국에서 새겨놓고 있는 것이다. 크메르인의 후손으로써 마음을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자야와라만7세가 즉위에 올리가기 전에는 앙코르왕조가 주변에 있는 새로운 국가를 공격하고 침입이 자주 받았기 때문에 국가가 흔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 뿐만 아니라 제일 큰 사건은 국내의 갈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1170대쯤에는 크메르 제국의 동쪽에 있는 주변국(잠국,Cham)에서 공격을 하고 침입하여 잠왕조가 몇 년 동안에 앙코르제국을 지배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잠왕조가 앙코르 수도에 들어와서 앙코르왕조를 멸망시키고 나서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앙코르 제국 왕. 왕족. 귀족 일반 국민 등을 죽여 버리고 앙코르 재산을 강탈해서 가져갔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자야와라만7세는 잠군에 잡혀서 잠국에 끄려 간 것이다. 잠국에 몇 년간에 머물다가 캄보디아에 들어와서 옛 국군하고 국민을 모으고 잠국이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는 전쟁을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자야와라만7세군이 잠국 군에 승리한 후에는 다시 크메르 제국을 독립시킨 것은 선언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는 자야와라만7세의 시대를 시작한다.

1181년에 즉위에 오린 후에는 국가의 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종교의 개혁도 시작했다. 불교가 기원전의 2~3세기에 캄보디아 땅에 들어올 때부터 기원후의 12세기말까지에 캄보디아역사상에 힌두교가 국교로 등장했는데 자야와라만7세 이후에부터 불교가 힌두교를 대신해서 국교로 선택되었다. 12세기말에는 불교사원을 설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캄보디아 수도를 야소타보라에서 노코둠(Angkor Thom에 옮기고 그 수도는 대승불교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앙코르 돔이라는 말은 크메르인들이 앙코르 왓과의 비교하면서 불러왔던 이름이다. 앙코르(Angkor)라는 말은 국가. 나라. 사원이라는 뜻을 기지고 있고 돔(Thom)이라는 말은 넓은 . 큰. 등을 뜻한다. 왜 그런 말이 생겼는가 의문이 많이 있었다.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앙코르톰은 소리야와라만2세가 1113년~1150년에 지었던 힌두교사원 앙코르 왓보다 더 큰 것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하고 있다. 앙코르왓은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제일 큰 힌두교사원이며 불교사원인데 앙코르톰을 비교하면 규모가 더 작다고 확인할 수 있다.

앙코르톰 사원은 해자하고 성벽이 사각형으로 다 계산하면 12Km에 이른다. 그런 규모의 불교 사원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특히 그 사원의 중심부에는 메르 산의 상징인 바욘(Bayon)사원을 지어놓고 있다. 제일 관광객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바욘사원의 사방 얼굴이다. 그 특징을 기지고 있는 사방 얼굴은 대승불교가 보살이 중생에게 해줄 수 있는 자비. 사랑 등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또는 5개의 출입문 탑하고 중앙 탑을 계산하면 54개의 탑을 기지고 있는 것은 자야와라만7세 시대에 캄보디아 전체에는 54개의 지방(도)를 나눴다고 한다. 자야와라만7세가 국 지방을 쳐다보고 보살처럼 스스로의 국민을 살펴본 것을 묘사하고 있다.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자야와라만7세가 “국민의 고통이 국왕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고 기록을 밝히고 있다.

수도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다프룸(Ta Phrum)사원은 두 번째의 큰 불교사원으로 손꼽힌다. 그 사원의 연구를 통해서 자야와라만7세의 어머니(Jayarajacudamani)에게 바쳤다는 것을 밝혔으며 진짜로 웅장한 불교 교육관이나 불교를 수행지등을 설명해놓고 있다. 그 증거들은 고고학자들이 발표하고 아직까지도 연구하고 있다. 다프룸사원을 지원해준 것은 3140마을 이었고 거기에는 거주자가 80000명이 있었으며 600명의 무용가가 있었고 수행자하고 불교 연구자가 2000여명이 있었으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큰 스승이나 교수들(박사)이 18여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에 그 사원에 들어가면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로 큰 불교교육원이나 수행 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가 다프룸사원을 보면 인도 북부에 있는 나란다 옛 불교대학을 생각난다고 주장했다. 어떤 고고학자가 다프룸사원이 그 당시에 있었던 두개의 제일 높은 교육기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는 다프룸사원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 북부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프라칸사원이다. 다프룸 사원 옆에는 큰 기숙사가 지었졌던 것이다. 그 기숙사는 이직까지도 유적을 남기고 있다. 대부분 사람이 번디야그다이(Ban Teay Kdey)이라고 부르고 있다. 학승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서 다프룸사원에 떠나 Ban Teay Kdey에서 거주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기록은 자야와라만7세가 석가모니불하고 관세음하고 다른 대승보살상을 새기고 숭배하고 특히는 삼보를 거룩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라칸사원은 자야와라만7세의 아버지에게 바친 것을 기록했다. 그 사원의 기록(K 908),1191)에 의하면 프라칸사원을 지원해줬던 1350개의 마을이 있었으며 3만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번디아니앙 사원(Ban Teay Nang)에서 발견했던 기록문은 자야와라만7세가 불교를 지원해주는 것을 뿐만 아니라 국민이 평온하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수도에서 먼 지방까지 가는 길을 지었고 길거리에서는 쉼터(Sala Samnak, 숙소)를 전국적으로 121개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증거들은 유적을 많이 발견했다. 캄보디아에서 발견했던 것뿐만 아니라 남부( 현재 태국 국토)에서도 많이 발견했고 북부(라우스 국토)에서도 발견했고 동남부(베트남 국토)에서도 발견했다.

번디아 즈마(Ban Teay Chmar1191)사원에서 발견했던 제일 중요한 기록문은 국민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국왕이 전국적으로 병원을 102개 지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제일 유명한 자야와라만7세가 남긴 병원은 니악 번(Neak Pean)사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Neak Pean사원이 앙코르톰 북부에 있는 국민 병원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질병을 치료했으며 방법은 민간요법이었지만 효과는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원에 있는 시설들이 대부분은 성스러운 요법을 가지고 대승불교의 약사부처님의 법으로 치료했다는 설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자야와라만7세의 두 번째 왕비가 대승불교의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불교의 지식을 많이 가지고 대승불교 비구니나 여성 불자에게 불교의 교리를 강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Bak Sey Cham Krong사원에서 기록해놓고 있는 제일 놀라운 이야기는 자야와라만7세의 인드라데위(Indradevi)왕비가 두 개의 불교대학의 총장이라고 새겨져 있는 사실이다. 그 기록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기록문의 내용이“인드라데위왕비가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불교의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자야와라만7세하고 앙코리왕족하고 국민들에게 불교교리를 알린 것을 새겨놓고 있다”. 그런데 그 기록문을 동의했지만 어떤 학자는 그 기록문을 의심하고 있다. 자야와라만7세의 부모님이 예전부터 불교를 신봉했는데 자야와라만7세가 어렸을 때부터 불교를 아는 것이 당연한데 왜 인드데위왕비가 이끌고 불교를 알게 됐느냐 의문을 가지고 있다. 많은 학자가 자야와라만7세가 부모님에게 전래됐지만 불교의 교리를 자세히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야와라만7세가 즉위에 올린 이후에는 인드라데위 왕비가 불교를 국교로 결정해줄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했다고 주장했다.

자야와라만7세는 자기 나라를 불국토로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노력을 많이 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국가 정치의 안정, 경제 발전, 종교를 조합하는 것이 제일 유명한 국왕을 말할 수 있다. 불교를 전 국민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자야와라만7세는 석가상, 관음상, 지장, 미륵보살상 등을 설립해놓은 것이다. 현재 앙코르 유적지에 가면 남아 있는 불상을 찾아볼 수 있다.이런 증거로서 자야와라만7세가 순수한 불자라고 말할 수 있다. 왕은 자기의 인생을 중생에게 봉사해주는 보살의 삶을 산다고 선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요즘의 제일 인기를 가지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번디아쯔마사원에서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 보살상이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개의 손을 가진 보살상이다. 그 보살상은 번디아쯔마사원의 성벽의 웅장한 관세음보살상을 말한다.

자야와라만7세 시대에는 크메르 제국은 국가의 정치 안전. 경제 개발. 교육관심등을 정책하고 12세기 말 13세기 초에는 캄보디아에는 불국토가 될지도 모른다고 많은 학자들은 설명해 놓고 있다. 자야와라만7세는 국가의 안정을 하기위해서 힌두교를 포용하고 인정해준 것을 중국의 순례자가 기록해놓고 있다. 국가 행사 때에는 불교지도자하고 힌두교 사제를 초대하여 같이 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야와라만7세는 수도권 근처에 있는 지방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앙코르 제국의 멀리에 있는 지방에서도 자야와라만7세의 사원하고 자야와라만7세상이 발견된다. 특히 대부분의 현재 태국 국토나 라이스 국토에서도 발견된다.

2) 앙코르 제국의 소승불교 등장

앙코르 제국은 802년~1218년에 존재했다. 두 종교가 크메르 제국에 같이 등장해왔다. 특히 불교는 대승과 소승이 그 당시에는 등장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국교가 된 시기에는 소승불교가 어떻게 됐는지를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가 자야와라만7세의 부모님이 소승불교를 신봉한다고 주장했는데 왜 자야와라만7세가 즉위에 오른 이후에는 대승불교가 국교가 된 것이 알 수 없는 일이다.

13세기에 들어와서 소승불교가 크메르인 삶에 점점 크게 자리잡아간 것이다. 소승불교가 어떻게 대승불교하고 힌두교의 입장을 대신했는가는 분명한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특히는 13세기 이후에는 크메르 제국 힘이 조금씩 쇠퇴하고 내부에 있는 갈등과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 그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새로운 왕국이나 국가가 소완나푸미(Sovanapumi)땅에서 몇 개 더 생긴 것으로 새로운 국가가 자기의 힘을 펴려고 해서 크메르 제국을 침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소코타이(Sokoteya)에서 타이족(thai)이 1350년에 시암왕조를 건국한 후에는 몇 번에 걸쳐 앙코르 제국을 침입하고 앙코르 제국 국토가 점점 작아졌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자야와라만7세 사망 이후에는 종교 갈등이 심하게 대립했다. 자야와라만8세가 왕위에 오린 후에는 자야와라만7세가 설립했던 불교사원이나 불상 등이 힌두교로 변모하고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들인 바욘사원이나 다프룸사원 등에 들어가면 그 흔적들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자야와라만8세가 그 대책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정치, 경제, 종교 갈등이 생긴 것이란 주장이 있다. 그 국왕은 그 행위가 있기 때문에 불자왕족, 귀족, 국민들이 그 왕을 지지하지 않고 불교를 파괴한 행동에게 반대했다고 한다. 국가가 혼란스럽게 된 것이기 때문에 외부 세력이 크메르 제국에 공격하여 들어온 것이란 주장이 있다.

13세기말에 시암왕조가 앙코르 제국에 공격하고 4년간에 앙코르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크메르왕가 시암왕조를 승리하고 나서 앙코르를 다시 복원하고 크메르인이 옛 시기처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소승불교가 대승불교를 대신해서 캄보디아 역사상에 등장했다고 한다. 소승불교가 크메르제국에 등장하고 있는 기록이나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몇 개밖에 없는데, 그 증거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소승불교는 자야와라만7세 시대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자야와라만7세 시대 때는 불교연구가 활발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불교를 공부시킬 뿐만이 아니라 불교 국가에 학승을 보내고 불교를 더 깊이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미얀마의 왕실 록에 의하면 소완나푸미(Sovanapumi)에 1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3국가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와프라야(Choa Puraya)강 하류는 몬(Mon)왕국이 있고 메콩(Mekong)강 하류부터 중류까지 넓은 국토를 가진 크메르 제국이 있고 동쪽 해안에는 잠왕조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왕실 록은 12세기 말에는 몬(Mon)승려하고 크메르(Khmer)승려가 실론 섬에 건너서 불교를 공부했다고 주장한다.

피마나가스(Bhimeanakas)사원에서 크메르어하고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해놓은 기록문의 내용은 “1180년에 자야와라만7세가 실론 섬에 불교를 연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파견했고 그 사람들 중에는 자야와라만7세의 아들(Tamalinda) 한 명도 파견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마린다왕자가 실론 섬에 들어가서 모하위하라(Mohavihara)에서 소승불교승려로 출가하고 10년 동안에는 모하위하라사원에서 소승불교를 연구해왔다. 1190년에 크메르 제국으로 돌아와서 장로(Mahathera)가 되고 법문할 때마다 소승교리만을 설명하고 순수한 불교를 크메르제국에게 전달하려 노력을 많이 했다. 그 당시에는 대승불교가 국교이지만 다마린다(Tamalinda)장로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소승불교의 입장에서 출가하고 근본 불교를 공부하고 사마타하고 위바사나를 수행하여서 소승불교가 그때부터 점점 커지면서 자야와라만7세가 사망 후에는 혼란한 시기를 겪어서 해방 뒤에는 대승불교가 점점 없어지고 소승불교시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13세말 이후에는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캄보디아역사나 불교사를 연구하기가 어려워서 외국의 순례자들의 기록을 통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제일 유명한 외국의 순례자나 외교관 중에는 1296년에 들어온 중국 외교관 수다관(Zhou Daquan)이란 사람이 있다. 수다관이 중국에서 크메르 제국까지 온 것은 쩬라 실록(Zhenla Record)책에 그 이유가 씌여져 있다. 그 실록은 캄보디아 역사를 연구하는 제일 중요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실록의 내용은 크메르인의 풍습이나 국가 관리나 생활 방식 등을 써놓고 있다. 특히 불교를 연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1181년에 대승불교가 국교가 되고 소승불교가 점점 커지고 1296년~1297년까지 대승불교가 크메르 제국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없어져버린다. 그 사람의 실록은 크메르인이 석가 상을 신봉하고 수도 내부에는 머리를 깎고 황색 옷을 입고 다니는 수행자가 있었고 아침에는 길거리에서 나가서 먹을거리를 모으고 하루에 한 번만 밥을 먹었고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만 되면 은둔한 장소에서 나와서 행사를 참석하고 국가 위기가 생길 때만 되면 왕궁에 들어가서 국왕을 만나고 국사를 의논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왕족. 귀족. 서민들도 존경을 받고 궁궐에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써놓고 있다.

그 실록에 의하면 13세기말에는 크메르 제국은 소승불교를 숭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승불교 승려들이 초기 불교의 법에 따라 수행자가 살 수 있는 것이 불자 보시에 달려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루에는 한 번 밥을 먹는 것도 소승불교 승려가 분명하다. 또한 황색 가사를 입는 것이 틀림없이 소승불교 승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에도 크메르 승려들이 다른 외국 승려들과 달리 황색 가사를 입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옛 조상들에서 전래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지 않다.

대승불교가 1세기부터 캄보디아 땅에 등장해왔던 것이 13세기가 된 후에는 역사상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뿌리가 끊긴 이유나 증거 등을 아직까지 발표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유적이나 발자국이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앙코르톰사원이나 다프룸 프라칸사원 등에 가보면 사방 얼굴의 관세음보살상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쯤은 캄보디아에는 전 국민의 95% 이상이 불교를 믿고 있어도 대승불교가 무언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관세음보살상을 단지 아름다운 조각상이라고 생각한다.

씨엠립에 있는 코스 스와제그(Kos Svay Chek)에서 발견됐던 불교 기록문들은 거의 대부분이 팔리어로 새겨놓은 것이다. 팔리어의 기록문을 찾은 것은 대승불교하고 힌두교가 1307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Svay Chek(K 754, 1308)기록은 스린드라와라만왕(1307`1327)이 불교를 권장했으며 전 국가 행사는 소승불교식으로 다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소승불교가 분명히 국교로 정해졌다고 주장했다. 소승불교는 크메르 제국 내부에서 발전한 것 뿐만이 아니라 1353년에 새로운 란상왕국(라오스)을 건국한 후에는 소승불교를 란상왕국에 전파사킨 것다고 전하고 있다.

앙코르 제국은 1432년까지 존재했고 시암왕국에서 공격하고 침입한 후에는 수도를 앙코르에서 프놈펜에 옮겼다고 해서 소승불교도 더 깊은 뿌리를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앙코르 제국 멸망 후의 소승불교

소승불교는 기원전의 2~3시기부터 기원후의 13세기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소승불교는 크메르인의 생활 속의 영향을 못 미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13세기부터 소승불교가 힌두교하고 대승불교를 대신해서 크메르인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증거들은 현재의 시기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앙코르 제국이 멸망한 후에부터 현재에까지는 소승불교가 크메르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줬는가는 분명히 확인할 수 없다.

왕실 기록에 의하면 1238년에 소코타이(Sukhothai)에서 시암왕조를 건국한 후에는 영향을 확대하고 앙코르 제국을 두세 번에 걸쳐 침입하고 1351년에 아유타야 왕국을 남부에서 설립하고 나서 시암국군은 앙코르 제국을 자주 공격했다고 밝히고 있다.

앙코르 제국의 왕 보냐야드(Bonya yat.1417~1463)는 시암군을 피하기 위해서 앙코르 수도를 떠나기를 결정했다. 앙크르 수도를 떠난 이유는 국가의 경제, 정치. 종교 등을 다시 강하게 정리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다. 앙코르 수도를 떠나서 현재 자리를 잡고 있는 프놈펜에 간 것이란 주장이다. 처음으로 프놈펜을 설립하고 7개의 주요 불교 사찰을 설립하고

그 7개의 사찰들은 현재에도 남아 있다. 프놈펜에 가면 프놈펜 시내에 있는 제일 큰 불교 교육관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놈펜에 수도를 옮긴 지 1세기를 지나서 크메르 왕조가 다른 롱웨찌(Long vek , 1525~1595) 수도를 옮기게 된다.

앙짠왕(Ang Chan.1516~1566))왕은 1525년에 왕위에 오른 후에는 국가의 경제, 정치, 종교 등을 튼튼하게 발전시키고 옛 앙코르 유적을 다시 복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앙짠(Ang Chan)하고 앙짠의 아달이 앙코르 유적을 불교사원으로 개발했다. 특히 1113년~1150년에 소리야와라만2세 왕이 지었던 힌두교의 앙코르 왓트를 불교사원으로 바꿨다. 앙코르왓은 16세기가 되면 사원 전체에는 거의 다 불상을 새겨놓고 있다. 힌두교의 석조 사원일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 석조 사원들도 소승불교식으로 다 바뀌었다고 한다. 불교 사원으로 바뀐 것은 힌두교의 석상이나 대승보살상들을 그 대로 모시고 소승불교식의 불상을 새기고 모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캄보디아의 제일 유명하고 제일 큰 좌불 상은 바뿐 사원에서 73m열반상을 찾아볼 수 있다. 전국에서 발견했던 유명한 열반상하고 좌불 상등도 있다. 특히 씨엠립 북부 지방의 구렌 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열반상과 검뿡톰 지방의 선둑산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좌불상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소승불교가 중세가 되어 캄보디아 역사상에는 계속 국민의 생활에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캄보디아 역사가 되고 많은 사회의 문제가 생겨도 불교가 크메르인의 삶에는 뺄 수 없는 것이다. 17세기~18세기에 들어와서 크메르라는 국가가 세계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고 어려운 시기를 겪어도 크메르인들이 불교를 지키고 믿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쪽에 있는 베트남 영향을 공격하고 서쪽에는 시암(태국)영향을 공격한 것은 캄보디아 불교가 옛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의 시기를 겪었다.

19세기가 되어도 강국의 영향을 더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엉뚱(Ang Duang)왕자는 시암국에 망명하고 거기에서 출가하고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캄보디아에 들어와서 왕국이 된 후에는 불교를 다시 회복하려고 많은 절을 지었고 불교를 정식적으로 공부한 기관을 시작했다. 또는 엉뚱왕은 시암국의 영향하고 베트남의 영향을 피하려고 해서 서양의 강국들을 비밀로 연락했다고 주장했다. 그 왕은 국가를 지도한 것은 거의 대부분의 국가법이 불교의 경전에서 나왔던 것을 주장했다. 왕위에 오린 후에는 국가를 개혁하고 국민의 삶을 개발한 것이다. 그것 뿐만 아니라 그 왕의 벼슬들은 불교의 계를 지킨 것이 중요하다. 왕, 왕자, 왕비, 왕족, 벼슬들은 술이나 마약 같은 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 왕의 세력은 더 커지면서 국민의 삶이 더 평온하고 안전하게 살았다고 주장했다. 그 왕은 국가를 잘 관리하고 불교도 많이 발전을 시킨 것은 캄보디아 역사상에는 큰 존경을 받은 왕의 중에는 한 명을 꼽는다고 한다. 불법으로 국가를 관리하는 왕이 Dharmamikaraja라고 불려 졌으며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캄보디아 주변국이 캄보디아에 영향을 미친 것을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엉뚱왕은 그 주변국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서 서양 강국과 계속해서 연맹을 맸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안 되고 시암왕조가 엉둥왕이 서양 강국을 연락한 것을 알게 돼서 심하게 반대를 선언했다는 설이 있다.

엉뚱왕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많이 노력했지만 주변국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아쉽게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의 왕은 엉둥왕의 큰 아들 노로덤왕이다. 노로덤왕자가 어렸을 때부터 방콕에서 유학하고 거기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엉둥왕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노로덤왕자가 왕에 올랐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아버지의 발자국에 따라 국가의 대표단들을 서양국들과 계속 연락한 것이다. 이 노력은 1863년에 프랑스와 비밀로 연맹을 맸었으며 캄보디아역사상에서 시암국하고 베트남국을 완전히 벗어나서 서양의 보호령 밑에 있기 시작한다.

많은 의견에 의하면 노로덤왕이 주변국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서 서양나라와 관계를 맺은 것은 두 개의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크메르 국을 역사적으로 지킬 수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불교와 크메르 풍습, 문화 등의 전통을 잇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2. 프랑스 보호령 밑의 캄보디아 불교

1863년에 프랑스 보호령의 관계를 결체한 이후에는 불교가 어려운 시기를 다시 겪었다. 프랑스군이 캄보디아에 들어와서 불교를 엄격하게 통제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당하면서 승려들과 국민들이 프랑스의 식민지를 반대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불교, 문화, 인권 등의 요구 운동이 자주 일어났다. 많은 승려들은 프랑스군이 체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주변국으로 망명하고 거기에서 독립 운동의 모임을 만들어놓고 국내에 살고 있는 서민과 승려들에게 연락하고 자주 프랑스 식민지를 반대의 운동이 일으켰다.

캄보디아불교가 제일 위험한 상황을 당하는 것은 프랑스식민지가 시작하자마자 프랑스에서 많은 프랑스인, 프랑스군,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 소녀, 선교사 등을 캄보디아에 파견된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은 천주교나 기독교를 포교하며 활동했다.

프랑스 식민지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캄보디아자녀의 교육은 거의 대부분에 사찰에서 교육을 맡아서 했다. 90% 이상의 남자들은 절에 가서 교육을 받고 나서 승려가 된후에 사회로 나가는 풍습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왕족하고 국민들이 불교를 지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프랑스식민지가 시작되고 나서 그런 풍습들이 계속 파괴를 되는 것을 보면서 왕족하고 국민이 힘을 합쳐서 불교, 문화, 인권의 파괴의 정책을 반대한 것이다. 19세기말에는 자녀교육은 두 방법으로 나눠졌다. 하나는 프랑스의 학교에 보내고 교육을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크메르인이 자기 프랑스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않았고 절에 자녀를 보내고 교육을 받고 프랑스학교는 여자아이나 수도에 살고 있었던 아이들만 다녔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왜 크메르인이 자녀를 프랑스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는가하는 의문이 많이 생겼다. 제일 큰 이유는 프랑스 학교에서 교육을 하는 것은 프랑스의 식민지를 사랑하는 것을 교육을 받고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프랑스 종교를 공부하고 자기의 문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크메르인이 프랑스 학교에 자녀를 보내주지 않은 것이다. 제일 큰 사건은 국가의 편지나 정식적인 서류 등을 불어로 쓰라고 정했고 크메르어로 쓰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일들을 왕조, 국민, 승려들이 참을 수 없어서 프랑스 식민지에게 시위운동을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 식민지는 그 정책을 다시 결정하고 전국에 있는 절에 국립 불교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설립한 것을 시작했으며 1929년에는 불교의 최고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불교의 최고 교육 기관은 95% 이상은 승려들이 공부하는 것이다. 그 교육을 받고 나서 승려들이 초등학교나 사찰 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국립의 최고 교육 기관에서도 교수 역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결정했다.

제1차의 세계 대전과 제2차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프랑스 식민지의 권력이 점점약해지면서 캄보디아에는 높은 교육을 받은 승려들이 일반인과 시하노크왕과의 힘을 합쳐서 국립운동을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1953년 11월 9일에 90여 년간에 걸친 프랑스 식민지시기가 끝난 것을 선언했다. 90여 년간에 걸친 제일 힘든 시기를 겪었던 캄보디아는 자유국가가 된 것은 국민들이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운 시하노크왕이 현재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다.

캄보디아인들이 제일 자랑스러운 것은 90여 년간에 걸친 프랑스(기독교. 천주교국가)식민지 밑에 있었던 것은 크메르인이 그 종교를 믿고 가진 사람이 크메르인 중에는 2%밖에 안 된 것을 주장했다. 크메르들이 자기 문화. 국어. 종교. 풍습을 잘 지킬 수 없었던 시기를 당해서 잘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자랑스럽고 프랑스인들이 존경을 받은 것을 주장했다.

독립한 후에는 전국 사찰은 정식적으로 불교의 공부를 시작하고 몇 년에 지나서 불교 대학이나 최고의 불교 연구원을 설립하고 캄보디아에는 불교가 풍부하고 발전한 시기를 말할 수 있다. 특히는 1929년에 설립해놓은 불경 연구원하고 불경 번역원은 자기의 작업을 계속 해서 1969년이 돼서 8만4천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40여 년간에 걸친 크메르어로 번역한 것이 선언되어 졌다. 1969년에 110권의 크메르어 대장경(삼장)완성을 캄보디아 원수가 국민에게 선언했다. 20세기 초부터 1970년대까지 불교 학자들이 사회 교육하고 많이 했으며 불교 교육과 밀접한 관계를 맸고 나갔다. 출가자들도 많이 생기고 불교 교육 기관도 퍼지고 사찰들이 국 지역. 마을이 생긴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금시기(Golden Age of Khmer Buddhism)는 계속 존재하지 못한 것이다. 70년대가 돼서 국내 갈등하고 국제 간섭을 받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진 크메르인들이 전쟁을 시작한다. 1970년 3월 18에시하누크 국가 원수의 권력을 뺏은 후에는 중국하고 북한에 망명하고 나서 거기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공화국을 반대 선언한 후에는 전쟁을 시작한다. 시하누크(Sihanouk)군하고 포르포드의(Pol Pot, Khmer Roughs) 원수 군이 힘을 합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롤군(Lon Nol)은 5년간에 걸친 전쟁을 계속한다. 마지막으로는 시아누크(Sihanouk)군하고 포르포드의(Pol Pot, Khmer Roughs)군이 승리하고 나서 1975년 4월 17일에는 포르포드의(Pol Pot, Khmer Roughs)정권이 시작된다.



3.포르포드의(PolPot, Khmer Roughs)정권시대의 캄보디아불교

포르포드군이 론놀군을 승리하고 나서 국민들이 기쁘면서 환영했는데, 하루 이틀을 지나서 수도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시민들이 시골에 쫓아낸 것이다. 승려, 환자, 아이, 임산부, 일반 서민 등이 시골로 쫓겨나고 힘이 없어서 갈 수 없는 사람이나 가지 못한 사람이 현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승려들을 절에서 나가라고 경고했고 “승복을 벗어”라고 했고 경고에 따르지 않은 승려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다. 특히 큰 스님이나 한 평생에 출가하신 스님들은 승복을 벗지 못하고 마지막에 가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고 전한다. 단 하루 이틀 만에 프놈펜 시내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길거리에는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 환자 등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불교사찰들은 다 파괴되고 교도소나 가축을 키우는 농장으로 변형되었으며 95%의 사찰은 교도소나 사람들을 죽이는 장소로 변했다고 한다. 또한 절에 있는 건물들은 파괴되고 불상들은 강물이나 연못을 버려 지게 된 것이다.

3년 3개월 20일간에 종교의 의식, 전통적인 관습, 종교 교육, 종교 포교, 종교를 신봉한 것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만약에 비밀로 부처님에 기도를 올리거나 비밀로 예불 같은 것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 그 즉시 죽임을 당했다.

종교부의 서류에 의하면 포르포드정권 이전에는 출가자가 6만여 명을 미친 것인데 3년간에 지나서 살아있었던 출가자수가 3000여명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승왕, 종정스님, 총무원장스님, 승왕 위원회 어른 스님들을 살해해서 버려서 아직까지는 어떻게 죽은 건지, 어디에서 죽은 건지, 무슨 죄목인지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1000여명의 불교학자스님들의 죽음은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3년 3개월 20일간에는 포르포드정권이 캄보디아를 통치한 시기에는 캄보디아 땅에는 승려를 한 명도 찾을 수 없는 시기였다.

4. 포르포드정권의 멸망 이후

포르포드정권은 캄보디아를 통치한 3년 만에 2백만여 명의 국민이 직접 죽이거나 먹는 것이 없어서 굶어 스스로 죽고 병으로 죽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승려들이 5만여 명 가까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1979년 1월 7일에 포르포드정권을 반대하는 군인이 베트남군을 도움으로 포르포드정권을 밀어 내고 태국에서 다시 정권을 설립한 것이다. 캄보디아 국민하고 캄보디아 불교는 그 땅에서 다시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정권을 허락받고 나서 1979년 9월 19일에 베트남 남부에 살고 있는 크메르족 소승불교 승려들을 모시고 살고 있었던 7명의 옛 출가자를 뽑고 구족계를 받고 출가하는 것을 시작했다. 처음 7명의 출가자는 캄보디아 전국을 다니면서 출가자들을 모았으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그 스님들이 캄보디아불교가 다시 이러나는데 아낌없는 많은 노력을 했고 그 당시에 출가했던 7명 스님은 현재까지 3~4분이 살아 계시며 캄보디아 불교와 캄보디아 사회의 최고지도자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현재의 캄보디아 불교

캄보디아의 역사를 보면 불교가 캄보디아에 존재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기원전에 이 땅에 들어온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1세기에 부난 국의 역사를 시작하고 나서 불교가 계속해서 존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 통치자에 따라 불교가 강해지고 약해진 것을 볼 수 있지만 1세기부터 21세기까지 1975년~1979년의 3년간을 빼고 캄보디아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캄보디아 불교는 요즘 95%이상의 국민들이 믿고 따라가는 종교이다. 불교는 크메르인의 삶, 정신, 심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90여 년간에 걸친 프랑스식민지를 겪었어도 크메르인의 불교 믿음은 붕괴되지 않았으며 70년대에 수많은 희생을 당했어도 불교는 크메르인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21세기의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도 크메르인이 불교의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신봉하고 있다.

43호의 캄보디아 헌법에는 캄보디아인들이 종교의 선택권이 있는데 불교를 국교로 정했다. 국민은 불교를 지키고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역할을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는 캄보디아에서 큰 역할을 가지고 있다. 각 마을 중심에는 절을 짓고 사회적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 주민은 어느 절의 주지스님이 큰 지도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는 절에 들어가서 주지스님과 그 문제를 상의하고 해결을 얻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마을 지도자보다 권력이 많고 많은 주민들은 그 주지스님의 말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절 주변에 있는 마을 주민들이 절에서 살고 있는 승려들을 지원해주는 것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다. 마을 주민들이 절에 의지하고 승려들은 주민 도움으로 수행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접근할 수 있도록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불교와 절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불교 사찰은 수행처가 되는 것보다 사회 복지 장소라 말할 수 있다. 힘들 때나 문제가 생길 때는 절에 가서 기도하고 명상하고 구경을 하는 것도 있고 스님을 초청하고 축원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불교는 인과를 이야기했지만 대중화화가 되기 위한 민간요법이나 민간의 미신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것은 대승불교나 소승불교나 어느 종교나 다 마찬가지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 7일을 지나서 자기 집으로 스님을 4명이나 5명을 초청하고 축원을 부탁하고 삼학(계학. 정학. 혜학)을 가지고 있는 승려에게 보시해주는 것이 크메르인의 일상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후에는 절에 맡겨두거나 절의 학교에 보내고 교육을 받는 것이다. 더 크면 절에 보내고 정기적으로 출가를 시켜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기간으로 삼는 것이다. 요즘은 절밖에 학교가 많은 생겼지만 90%이상 절 앞에 학교가 있다. 절 학교는 큰 스님들이 만든데 학교 운영하는 것이 정부가 담당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왓 보(Wat Bo)사에 앞에 있는 학교는 왓 보 학교라고 불리는 것이다. 요즘은 스님들이 직접으로 가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지만 일주일에는 한두 번에 가서 불교를 학생에게 알리는 것이다.

옛날부터 중요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이 한 평생 한 번이라도 출가를 안 하면 진짜 남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서 남자들이 3개월이라도 출가를 하는 것이다. 사미로 출가하면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비구로 출가하면 아버지에게 은혜를 갚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 아이들은 싫어도 한 평생에 한 번은 절에 가서 승려 생활을 해보려고 하는 생각이 있다. 부모 입장에는 자기 자식 중에는 한 명이라도 출가하면 자기는 많은 공덕을 쌓은 것이라고는 믿음이 있다. 자기 남자 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나서 사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출가해줘 달라고 하는 부모님이 적지 않다. 한 가족에 한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을 할 때는 자기의 아이나 손자나 가족 중에는 꼭 한 명에 7일간에 은혜를 갚기 위해서 출가하는 것이다. 가족 안에 있는 한 명이 출가해주면 자기의 영혼, 넋은 극락세계에서 왕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장례식을 할 때는 빠짐없이 스님들을 초청하고 보시해주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시신은 절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매장을 하며 남은 유골은 절에 있는 유골 탑에서 모셔 두는 것이다.

결혼식에도 많은 전통의식이 있는데, 빠지지 않는 의식은 스님을 초청하고 축원해주고 보시를 주는 것이다. 한마다로 말하자면 크메르인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불교와의 관계를 맸고 불교와 뗄 수 없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일 큰 중요한 캄보디아 불교 풍습은 남자들이 한 평생에는 한 번은 출가를 해여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무가 아니지만 남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출가생활을 경험해 보고 나서 결혼하거나 사화생활에 들어가면 출가해본 사람이 사회에 들어가도 좋은 반응을 받고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답은 출가해본 사람은 사회에 들어가도 불교를 사랑하고 불교를 지키는 마음이 있어서 진짜 불자라고 대답한다.

그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나 지도자가 될 때는 불교를 지키는 사람을 믿기 때문이다. 요즘의 캄보디아 지도자는 임금부터 총리, 국회의원들이 거의 다 출가해본 사람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이 불교를 지키는 능력이 있고 출가자가 불교를 포교하거나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데 정치적으로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5.1 캄보디아 불교 종단

캄보디아 불교 종단은 두 종파를 가지고 있다. 한 종파는 예전부터 캄보디아에서 생긴 것이고 한 종파는 1857년에 태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캄보디아 전통 불교 종파는 95%정도의 국민이 믿고 있고 다른 종파는 5%안팎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예전부터 캄보디아의 순수한 종파는 마하니카야(Mahanikaya)종이라고 불린다. 한 다른 종파는 다마유디카니카야(Thomayuttikanikaya)라고 불린다. 캄보디아 불교의 두 종파 차이점은 승복의 색깔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은 기도문이나 예불문의 발음이 태국의 발음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요즘은 60000여명의 승려들은 다마유디카니카야(Thomayuttikanikaya)승려가 2000명밖에 안 되는 것이다. 다마유디카니카야(Thomayuttikanikaya)종은 왕족과의 가깝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왕족이 다마유디카니카야(Thomayuttikanikaya)종에 출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종파는 1841년의 몽꾸드(Mong Kut)왕 시대에 태국에서 일어났으며 그 당시에 캄보디아 왕자가 태국에 유학을 갔고 다마유디카니카야(Thomayuttikanikaya)종의 사찰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엉뚱왕 때에 캄보디아 승려인 모하빤스님으로부터 1857년에 전파됐다. 그런데 왕족의 종파라도 크메르인에게 큰 영향이 없는 것이다. 특히 태국에서 들어온 종파이기 때문에 캄보디아인들이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 종파는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들어와서 마하니카야(Mahanikaya)종과 갈등이 있었는데 이직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어느 절에는 다마유디카니카야(Thomayuttikanikaya)종의 승려들이 마하니카야(Mahanikaya)종의 승려들과 같은 사찰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같은 수행법이나 같은 것이 많아서 지금까지는 아무 갈등이 없다. 그런데 불교의 큰 역할을 가지 있는 종파는 마하니카야(Mahanikaya)종의 종정스님, 충무원장스님, 승왕의 위원회스님들만 결정하고 다마유디카니카야(Thomayuttikanikaya)종의 지도자가 큰 영향이 없는 것이다.

5.2 캄보디아불교의 교육

불교의 교육은 일반인의 사교육과의 거의 똑같은 것이다. 출가하기 전에는 절에 들어가서 불교의 기본 교리나 불법이나 계율 등을 수련하고 나서 출가하는 것에 허락을 받고 12세 이상에는 사미스님이 될 수 있고 21세 이상이 되면 비구계를 받을 수 있다. 출가하고 나서 3년간의 삼장(Dharma. Vinaya School) 교육을 받고 아니면, 발리 학교(Bali School)에 다니는 것이다. 발리 학교는 일반 학교와의 똑같은 프로그램을 기자고 있다. 많은 젊은 출가자들이 대부분은 발리 학교에 다녀야하는 것이다. 그 학교는 초등학교,중학교, 고등하교, 대학교까지 공부할 수 있고 자격증은 캄보디아에는 어디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승가 교육은 불교만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대학은 스님이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을 골라서 공부하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불자는 4가지로 나눠진다. 스님들, 우바새와 우바이, 다이요그와 다이가, 일반 불자다. 스님들이 일반인처럼 일하는 것은 아니고 절에서 수행하고 불교를 공부하는 것만 하는 것이다. 우바새와 우바이는 일주일에는 꼭 절에 가서 계를 받고 지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이 스님처럼 머리를 깎고 절에 갈 때에는 하얀 색 옷을 입고 일주일에는 1박 1일의 8계를 지키는 것이다. 다이요그와 다이는 절에 자주 가고 불교 행사나 의식에 참석하고 꼭 계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승려에 보시해주는 자다. 일반 불자는 불교의 명절이나 특별한 의식에만 참석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5.3불교의 명절

캄보디아의 명절은 거의 다 불교와의 관련이 있다. 제일 큰 명절은 음력(Kea Chet)의 5월의 설 명절이다. 다른 하나는 음력의 9월(Kea Asoch)) 프쫌벤(Pchum Ben)명절이다. 프쫌벤 명절에는 불자들이 15일간에는 새벽부터 절에 들어가서 불교의식을 하는 것이다 이 명절은 캄보디아에는 제일 큰 명절을 말할 수 있다. 그 명절들은 3일간에 전국에 쉬는 날이 되는 것이다. 다른 불교의 특별한 날은 음력의 3월(Kea Meak) 보름에는 마가보찌아(Makabojea)에는 하루에 쉬고 불자들이 절에 가는 날이 되는 것이다. 음력의(Kea Pisaka) 15일의 보름에는 비사가보찌아(Pisakabochea,부처님 오신 날)에는 하루에 쉬는 날이 있고 불자가 절에 가는 날이 되는 것이다. 다른 불교의 특별한 날도 있다. 불교가 국교로서는 명절이 거의 다 불교와의 관련이 있다. 명절이 아니라도 전통적인 의식 같은 것도 불교와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

Ⅲ.결론

캄보디아 불교 역사를 보면 불교가 캄보디아에 들어온 것이 2300여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불교가 크메르인의 삶, 전통 문화, 크메르인의 풍습이 된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불교는 크메르인의 삶이 되고 크메르인의 풍습이 되는 것을 보면 크메르인하고 불교는 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보면 캄보디아 불교가 어려운 시기를 지나서 어떤 때에는 잠깐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고 없어지고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크메르인의 조상들이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린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되어 진다. 캄보디아 땅에서 불교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한 것을 생각하면 후손들이 일을 열심히 하고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일 뿐만 아니고 불교를 지키는 것이 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크메르인에게는 그냥 종교를 숭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크메르인의 영혼, 삶, 정신, 문명, 문화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회에 들어오면서 사람의 마음이 변화한 것에 따라 불교도 현대의 사회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나라의 불교를 공부하거나 연구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불교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자기 나라의 불교가 현대의 사회에 따라갈 수 있도록 불자들로써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캄보디아 불교는 1975년~1979년에는 내전이 생긴 이후에는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제일 힘든 시간을 지나서 아직까지 캄보디아 사회에는 튼튼하게 자라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뿐이 좋고 다른 나라도 불교도 발전하고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불. 법. 승을 거룩하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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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17, 2011

Monday, August 29, 2011